‹ 목록으로 달콤한 배신, 조용한 진심

1화

옥상으로 올라오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강도윤은 손끝이 먼저 떨려오는 걸 느끼며 몇 번이나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는데, 발신인은 다름 아닌 윤서아였고 내용은 그저 "할 말 있어. 옥상으로 와"라는 짧은 문장 하나뿐이었지만, 그 여섯 글자가 도윤의 머릿속에서는 열 번도 넘게 재생되며 심장을 두들겨댔다. 교실을 나서기 전, 도윤은 괜히 셔츠 깃을 매만지고 앞머리를 한 번 더 쓸어 넘겼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우스워서 실소가 새어 나왔지만 그 웃음마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옆 동네로 이사 온 서아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도윤은 그녀가 웃을 때마다 세상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고, 그 착각은 1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채 마음 한구석에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전학 첫날, 낯선 교실 뒤편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서아에게 먼저 다가가 자리를 옆으로 옮겨준 것도 도윤이었고, 그날 이후로 둘은 등하굣길을 함께 걷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다른 남자애들과 웃으며 이야기할 때마다 명치 아래가 조용히 조여드는 감각을 견뎌야 했고, 그런데도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스스로를 달래며 지금까지 버텨온 터였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반이 갈렸을 때도, 도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쉬는 시간마다 서아네 반 창문 앞을 서성이던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옥상 문을 밀고 나가자, 저녁 무렵의 붉은 빛이 콘크리트 바닥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서아가 도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살짝 웃었는데, 그 웃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붉게 물들어 보이는 것도 그저 노을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바람이 옥상 위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서아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고, 도윤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도 감히 오래 쳐다보지 못한 채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갑자기 불러서 놀랐지." 서아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 도윤은 애써 심드렁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지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속까지 들리는 것 같아서, 도윤은 애꿎은 주머니 속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서아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더니,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는 도윤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고, 그 순간 도윤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몇 초가 몇 분처럼 느려졌고, 그사이 저녁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가며 정적을 더 짙게 만들었다. "나 사실, 오래전부터 너 좋아했어." 그녀가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그 문장이 귓속을 통과하는 순간, 도윤은 심장이 어딘가 위로 솟구쳤다가 그대로 붕 떠오르는 감각과 함께, 10년 동안 눌러두었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걸 느꼈다. 목이 메어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그저 서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게 꿈은 아닌지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다. 정말이야? 지금 이 순간이, 내가 10년을 참아온 그 시간이, 드디어—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면서도 온갖 생각이 동시에 밀려드는 이상한 감각 속에서, 도윤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나도……" 도윤이 겨우 입을 떼려는 순간, 옥상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반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성공! 십만 원 내놔!" 누군가 소리쳤고, 곧이어 폭소가 옥상 전체를 뒤덮었다. 도윤은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웅성거리는 아이들과 손에 든 휴대폰 카메라들, 그리고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웃고 있는 서아를 번갈아 보았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소리와 낄낄대는 야유가 겹쳐지며, 도윤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낯선 소음으로 가득 찼다. "뭐야, 이거……" 겨우 새어 나온 목소리가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미안, 미안! 근데 반응 진짜 리얼했다니까." 임하늘이 배를 잡고 웃으며 다가왔다. "야, 강도윤 표정 봤냐? 완전 감동해서 눈물 찔끔할 뻔한 거 다 찍혔어, 이거 완전 레전드 각이다." "벌칙 게임이었어, 아까 체육 시간에 진 사람이 좋아하는 애한테 고백하기. 서아가 걸렸잖아." 다른 아이가 낄낄대며 덧붙였다. "근데 하필 상대가 강도윤이라니, 이건 뭐 운명인가 벌인가."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달아 터지고, 누군가는 벌써 영상을 다시 돌려보며 "이 부분 편집해서 반톡에 올리자"고 낄낄거렸다. 도윤의 시선이 다시 서아에게 닿았고, 서아는 순간 웃음을 멈추더니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도윤은 서아의 눈동자에 스치는 당혹감을 분명히 보았지만, 그것이 자신을 향한 미안함인지 그저 상황이 틀어진 것에 대한 곤란함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각이란 이런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붕 떠올랐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추락하며 부서지는 것. "……그래." 도윤이 낮게 내뱉었다.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가 뒤섞여 옥상을 가득 채우는 동안, 도윤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걸 느꼈다. 붉게 물들었던 노을조차 이제는 그저 차갑게만 보였고, 조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옥상이 순식간에 남의 공간처럼 서먹해졌다. 잊지 못했다. 그 순간의 웃음소리, 그 순간의 표정들, 그리고 자신이 방금 무너뜨린 10년의 시간을. 초등학교 때부터 쌓아온 마음이, 방금 저 웃음소리 몇 개에 산산이 부서져 콘크리트 바닥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도윤아, 잠깐만." 서아가 무언가 말하려 다가왔지만, 도윤은 그녀를 지나쳐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갔고,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들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유난히 크게 울렸고, 도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이제껏 참아왔던 것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애써 삼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도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만 진심이었던 걸까. 그 대답을 알면서도, 도윤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