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밤이 깊었다.
백우단이 임시로 묵고 있는 마을 회관 별채로 이안이 찾아갔다. 도현에게는 곽태산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말했으나, 정확한 내용은 숨겼다. 스킬에 관한 이야기를 밝힐 수는 없었다. 아직은 아무도 몰라야 했다.
별채로 가는 골목은 어두웠다. 마을 사람들이 다 잠든 시각이라 발소리만 유독 크게 울렸다.
'혹시 알아채실까.' 이안은 걸으며 생각했다. 곽태산은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노인이라면 도안이 반응하는 것조차 감지할지도 몰랐다.
곽태산은 화롯불 앞에 앉아 있었다. 불빛이 그의 주름진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왔느냐." 그가 말했다. 목소리에 이미 이안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네." 이안이 맞은편에 앉았다. 방바닥은 차가웠지만 화롯불의 온기가 그나마 그 냉기를 눅여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 눈빛이 심상치 않더구나." 곽태산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혹 궁금한 게 있어서 온 게 아니냐."
"...맞습니다." 이안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 정도는 굳이 감출 필요가 없었다.
곽태산이 손끝에서 작은 불씨 하나를 피워 올렸다.
화르륵-
작은 화염이 손바닥 위에서 일었다. 열기가 방 안으로 은근히 퍼졌다.
"이게 보이느냐." 곽태산이 물었다.
"불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도는 기운도 보입니다." 이안이 답했다.
곽태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 자체가 아니라 기운의 흐름을 말해보아라." 그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시험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손끝에서 시작된 흐름이 원을 그리다가, 특정한 형태를 이루면서 불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이안이 관찰한 대로 말했다.
"형태라. 그 형태가 어떤 식으로 보이느냐."
"동그란 매듭 같습니다. 마력이 매듭을 지었다가 풀리는 순간, 불이 됩니다."
순간, 이안의 눈앞에 문구가 떠올랐다.
【도안(盜眼)】 조건 충족 - 대상: 화염 생성 마법(초급)
분석 진행률 12%
'됐다!' 이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스킬이 마침내 반응하고 있었다. 다만 분석 진행률이 낮아,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12퍼센트라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뜻이었다.
'조금 더 봐야 한다.' 이안은 곽태산의 손끝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곽태산은 이안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허허, 이거 예사 아이가 아니구나." 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와는 다르게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르신,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물어보아라."
"마법을 익히는 데는 어떤 원리가 있습니까. 저는 독학으로 마력 순환만 익혔을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합니다."
곽태산이 지팡이를 바닥에 짚으며 자세를 고쳤다. 손바닥 위의 불씨는 어느새 꺼져 있었다.
"마법에는 속성 적성이라는 게 있다. 불, 물, 흙, 바람, 그밖에도 여러 가지지. 사람마다 타고난 그릇이 다르다는 뜻이야." 그가 설명했다.
"제 적성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직접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다만... 네 마력 순환 방식은 독특하구나. 누구에게 배운 것이냐."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혼자 익혔습니다." 이안이 솔직히 답했다.
곽태산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독학으로 이 정도라니.' 그는 속으로 그렇게 여겼다. 정규 교육을 받은 마법사들도 마력 순환 3단계를 익히는 데 수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스승도 없이 그 경지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보통은 어떻게 배우는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정식 마법사는 대개 마탑이나 스승 밑에서 자세를 배운다. 호흡법부터 시작해서, 마력을 몸 안에서 도는 감각을 익히는 데만 수년이 걸리지. 그 다음에야 겨우 첫 번째 마법을 시전한다." 곽태산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런데 너는 그 과정을 혼자, 아무 지도 없이 뚫어냈어. 그것만으로도 예사 재능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같은 경우는 드문 겁니까."
"드물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곽태산이 고개를 저었다. "평생 마법 가르치는 일을 해온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마법은 이미지로도 익힐 수 있다." 곽태산이 말을 이었다. "충분한 마력 순환과 명확한 이미지가 있다면, 스스로 마법을 구축해낼 수도 있어. 다만 그것은 매우 드문 재능이다."
"저도 가능할까요."
"모르겠구나.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어 보인다."
"만약 제가 이미지를 명확하게 그려낼 수 있다면, 스승 없이도 마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입니까." 이안이 다시 물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다만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마법이 폭주하거나 아예 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지." 곽태산이 경고하듯 덧붙였다. "정식으로 배운 마법사들이 그 방법을 꺼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심하겠습니다."
곽태산은 잠시 이안을 바라보다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가서 쉬어라. 밤이 늦었다."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안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면서도 이안의 머릿속에는 분석 진행률 12%라는 숫자가 맴돌았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쨌든 스킬이 반응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첫걸음을 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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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백우단 일행은 저녁 식사 자리에 모였다.
설하늬는 낮잠을 자다가 늦게 나타났다. 견인족 특유의 귀가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잠이 덜 깬 얼굴로 자리에 앉자마자 국그릇을 끌어당겼다.
"곽 노인장, 어제 그 꼬마 얘기가 마을에 돌았던데." 서준혁이 국을 뜨며 물었다.
"흥미로운 아이더군." 곽태산이 답했다. "독학으로 마력 순환을 익혔고, 마력을 시각적으로 인지할 줄 알아."
"그게 대단한 거야?" 설하늬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어지간한 견습 마법사도 몇 년은 걸리는 일이지." 곽태산이 말했다.
"흠, 신기하네." 설하늬는 대충 대답하고 다시 고기를 뜯었다. 별로 관심 없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준혁은 곽태산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노인장이 그렇게 관심 보이는 애는 드문데." 그가 말했다.
"이 마을에 온 것도 헛걸음은 아니었던 셈이지." 곽태산이 씁쓸하게 웃었다.
"설마 제자로 들일 생각인 건 아니지?" 서준혁이 반쯤 장난스럽게 물었다.
"글쎄... 그 아이 뜻에 따라야 할 문제지." 곽태산이 애매하게 답을 흐렸다.
하지만 곧 화제는 다시 본래 목적으로 돌아갔다.
"이무기 얘기부터 정리하지." 서준혁이 지도를 펼쳤다. "목격 지점을 종합하면 강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 중이야. 습성상 야행성이고, 물속에 오래 머무는 종류로 보여."
"덩치는." 설하늬가 물었다.
"목격자 말로는 몸통 둘레가 사람 허리 세 배는 된다더군." 서준혁이 답했다.
"C급치고는 좀 벅찬 크기인데." 설하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 내일 새벽에 상류 쪽 지형부터 살펴보자." 서준혁이 말했다.
"밤에 움직인다니까 낮에 움직이는 게 안전은 하겠네." 설하늬가 젓가락으로 지도의 강줄기를 짚었다. "여기, 이 구간이 물살이 세다고 했잖아. 여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동의해." 서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곽 노인장은 어떻게 생각해?"
"물속에 오래 머무는 놈이라면 마법으로 물을 끌어내는 것도 방법이겠지." 곽태산이 말을 얹었다. "다만 그 정도 크기라면 상당한 마력이 필요할 거다."
"그건 노인장 몫이겠네." 설하늬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늙은이를 너무 부려먹는구나." 곽태산이 껄껄 웃었다.
이 대화는 마을 사람들의 귀에도 흘러들어갔다. 밤사이 소문은 부풀려지고 부풀려져, 다음 날 아침에는 이무기가 사람만한 크기의 뱀이 아니라 산만한 괴물로 둔갑해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노파는 이안을 붙잡고 이무기가 산 하나를 통째로 삼킬 수 있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날 아침, 새로운 소식이 마을을 덮쳤다.
강 상류로 나무를 하러 갔던 마을 남자 셋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마을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아침부터 여인들의 곡소리가 회관 앞마당까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