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 영애, 숨겨진 체술

5화

왕궁의 깊은 밤, 여왕 강혜란의 집무실에는 등불 하나만이 조용히 켜져 있었고, 그 불빛이 그리는 그림자가 벽 위에서 흔들릴 때마다 방 안의 정적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두꺼운 서류 더미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탁, 탁, 탁. 반복되는 그 소리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분노와 걱정이 뒤섞인 초조함이었는데, 그것은 오늘 낮 있었던 국정 회의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강현준이 왕세자로서 처음으로 주재한 인접국과의 무역 협상 자리에서, 그는 상대국 사절의 노골적인 조롱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그 결과 오랫동안 준비해온 무역 협정이 무산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강혜란의 눈길이 한 문장에서 멈추었다. 상대국 사절이 협상 도중 웃음을 흘리며 “왕세자께서는 아직 어린아이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하신 모양입니다”라고 내뱉었다는 대목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현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협상장을 나가버렸다는 뒷문장에 이르러서는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서……' 몇 달을 준비해온 협정이었다. 국경 너머 물자 유통을 위해 밤낮으로 조율해온 조항 하나하나가 그 순간의 감정적 결정 하나로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이, 강혜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세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요." 회의가 끝난 뒤 강현준이 태연하게 던진 그 말이, 강혜란의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며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세아라니. 나라의 존망이 걸린 협상 자리에서 그런 말이나......' 분노에 가까운 실망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강혜란은 서류를 거칠게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관자놀이의 맥박이 유독 세차게 뛰고 있었다. 윤세아는 그날 협상 자리에 동석해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눈물을 흘리며 강현준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 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의 그런 태도가 상대국 사절에게 왕국 전체를 얕보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혜란은 뒤늦게 보고받아 알게 되었다. 보고서 말미에는 사절이 자리를 뜨며 남겼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이 나라의 왕세자궁에는 정치를 아는 이가 없나 보군.”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강혜란은 서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도 막을 수 없었다. 똑, 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강혜란이 고개를 들자, 문이 열리며 왕태후 서혜경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도 자지 않았느냐." 서혜경의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함이 배어 있었고, 강혜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늘 협상이...... 완전히 무산되었습니다." 담담하게 보고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추지 못한 지침이 서려 있었고, 서혜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낮게 중얼거렸다. "현준이는 애초부터 그 자리에 어울리는 아이가 아니었지." 서혜경의 그 말에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담겨 있었는데,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애정과는 별개로 오랜 세월 왕실을 지켜본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그 아이가 서은과 함께였을 때는 그래도 최소한의 균형이 있었습니다." 강혜란이 나지막이 덧붙이자, 서혜경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은이 강현준의 옆에 있었을 때, 그녀는 외교 문서의 세세한 조항까지 미리 파악해 강현준이 실수하지 않도록 뒤에서 조율해왔고, 사교 모임에서도 그의 부족한 언행을 자연스럽게 감춰주는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이제야 뒤늦게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강혜란의 머릿속에는 문득 지난 협상 자리, 이서은이 조용히 강현준의 곁에서 서류를 정리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풍경이라 여겨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 손끝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는지가 새삼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저희는 그 아이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요." 서혜경의 목소리에 짙은 후회가 섞여 있었고, 강혜란 역시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서은은 단순히 완벽한 예법과 학식을 갖춘 인형이 아니라,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진짜 능력을 갖춘 인재였다는 사실을, 강혜란은 그녀가 몇 차례 참석했던 국정 자문 자리에서의 발언들을 떠올리며 새삼 되새기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서은은 나이 든 대신들 앞에서도 조금의 위축됨 없이 조세 제도의 허점을 조목조목 짚어냈고, 그 냉철함에 몇몇 대신들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던 것을 강혜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영민한 아이라 여기고 지나쳤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드문 재능이었는지를 뒤늦게야 깨닫는 셈이었다. '그 아이가 남긴 제안서들만 다시 살펴봐도...... 현준이보다 몇 배는 더 나라를 생각하고 있었어.'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순간, 강혜란은 자신이 그동안 아들의 정혼자를 얼마나 소홀히 대해왔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고, 그 사실이 가슴 한편에 무거운 죄책감으로 내려앉았다. "지금이라도 그 아이를 찾아야 합니다." 강혜란이 결심한 듯 단호하게 말하자, 서혜경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추방되었는지는 알고 있느냐." "국경 너머, 인접국 쪽으로 보내졌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그 이후의 행적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강혜란의 대답에 서혜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치가 않구나." 서혜경이 낮게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왕실의 명으로 국경 밖으로 쫓겨난 처지였으니, 곱게 자란 그 아이가 낯선 타국에서 어떤 고생을 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우려가 그녀의 목소리에 짙게 배어 있었다. "현준이 몰래 움직여야 할 게다. 그 아이가 알면 또 무슨 소란을 피울지 모르니." 서혜경의 우려에 강혜란은 씁쓸하게 웃으며 동의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이 이서은의 존재를 다시 알게 되었을 때 보일 반응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정보상들에게 은밀히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 아이의 행방을 최우선으로 찾도록." 강혜란은 그렇게 말하며 서랍에서 작은 인장을 꺼내 들었고, 그 인장에는 왕실의 문양이 아닌 개인적인 표식이 새겨져 있어 이 일이 공식적인 절차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서혜경은 그 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찾더라도...... 그 아이가 다시 이 왕궁으로 돌아오려 할지는 모르겠구나." 그 말에 강혜란의 손끝이 잠시 멈추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무례와 방관을 이서은이 어떤 마음으로 견뎌왔을지,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손을 내미는 자신들을 그녀가 어떤 얼굴로 마주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서은아......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강혜란은 인장을 서류에 눌러 찍었고, 그 순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밤바람이 낮게 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 같은 시각, 국경을 넘어 인접국의 소도시에 자리 잡은 이서은은 별빛 주점의 부엌에서 첫 요리를 준비하며 낯선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칼끝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부엌을 채웠고, 낯선 향신료의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마다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재료를 다듬어야 했다. 왕궁의 화려한 주방과는 전혀 다른, 좁고 낡은 부엌이었지만 이서은은 오히려 그 낯섦 속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는 자신을 향한 비웃음도, 눈치 볼 시선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아직 자신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왕궁의 은밀한 시선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직 눈앞의 새로운 삶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에서, 이서은을 향한 두 개의 시선이 조용히 교차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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