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나는 소희의 표정을 보고 짐작했다.
좋은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걸.
소희는 찻잔을 매만지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평소라면 눈을 똑바로 보고 할 말은 다 하는 애였다.
그런 소희가 이렇게 시선을 피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뭔데."
소희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어제 재무원 회의 끝나고, 한도진 자작이 다른 자작들이랑 술자리에 있었대."
"그런데."
"그 자리에서... 너 얘기가 나왔대."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소희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웃으면서 가볍게 던질 이야기도, 지금은 마치 살얼음을 걷듯 하나씩 골라내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했는데."
소희는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리고 마치 외워둔 것처럼,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여자 덕분에 가문이 숨은 붙어 있는 거지. 장인어른 지원 없으면 우리 집안은 벌써 끝났을걸.' ...이라고 했대."
"그리고, '뭐, 그것 말고는 딱히 쓸 데가 있나' 하고 웃었다고 들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 안의 온도가 갑자기 낮아진 것 같았다.
"...서윤아."
"잠깐만."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숨이 이상하게 짧아졌다.
숨을 들이쉬는데도 가슴 안쪽이 텅 빈 것처럼 허했다.
'자원.'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남편이 아내를 자원이라고 부른다.
그것 말고는 딱히 쓸 데가 없다고 웃는다.
나는 5년 동안 그 웃음 앞에서 잔을 채워왔다.
5년 동안 그 웃음을 이해하려 애써왔다.
그 웃음이 다정함이라고 믿으려 애써왔다.
"그게 진짜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확실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직접 말해준 거야. 나도 처음엔 못 믿었어."
소희는 내 손을 잡았다.
"서윤아, 나는 이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이건 알아야 할 것 같았어. 계속 모르고 지나가는 게 더 잔인한 것 같아서."
나는 소희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소희가 내 손을 가만히 감싸 쥐며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괜찮아?"
소희가 낮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그 말을 계속 곱씹었다.
'자원.'
결혼 초, 한도진이 내게 청혼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처럼 총명한 사람이랑 사는 건 내게도 자랑이 될 거야."
그날 그는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웃었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따뜻해 보였는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누군가가 나를, 이서윤이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그냥 나로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총명함이라는 것이, 결국은 아버지의 상단과 재산으로 이어지는 총명함이었을까.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데려올 수 있는 것들 때문이었을까.
'설마.'
'설마 그럴까.'
나는 애써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 5년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 덮어두었던 서랍을 열어버린 것처럼, 한 번 시작된 기억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 3개월 차, 그가 내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돈을 부탁해달라고 했던 날.
그때 그는 미안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내 손을 꼭 잡았었다.
나는 그 미안함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결혼 1년 차, 시어머니의 병원비를 내 명의로 빌려야 했던 날.
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도 그는 나를 보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고맙다는 말이 그저 형식적인 인사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결혼 2년 차, 소라의 사교계 데뷔 비용을 아버지가 대신 내주었던 날.
그날 도진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고, 나는 그 웃음이 나 때문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그가 나를 향해 웃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다정하게 손을 잡아준 적이 몇 번이었는지.
따로, 순수하게 나를 보고 웃었던 순간이 있었는지.
나는 손가락을 접으며 세어보려 했다.
그런데 셀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한 손으로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그런 순간은 드물었다.
방 안의 촛불이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바람이 없는데도.
불꽃이 옆으로 길게 누웠다가 다시 곧게 서기를 반복했다.
지지직, 하는 소리가 초 심지에서 났다.
나는 그 흔들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내 손이 이불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손을 펴려고 했지만 좀처럼 힘이 풀리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딱히 쓸 데가 있나.'
그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마치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내가 지금까지 뭘 위해서 잔을 채워왔던 거지.'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찾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데 촛불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과는 상관없이, 마치 내 안의 무언가에 반응하듯이.
나는 그 불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