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세자의 오메가 신부

5화

벽에 등이 붙었다. 도현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분간은." 그가 말했다. "내 옆에만 있어줘." 목소리가 낮았다. 명령이라기보다 애원처럼 들렸다. 나는 그 온도 차이에 말을 잃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은 눈 속에 불안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편지 이후로 그는 계속 이런 얼굴이었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그의 어깨 너머로 창밖이 보였다. 가로등이 노랗게 켜져 있었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숨을 죽였다. "도현아."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 편지, 진짜 무슨 내용이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열기가 옮겨왔다. "말 못 해줘?" "……아직은."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흔들리는 걸 처음 봤으니까. 늘 여유 있던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사람. 그런 도현이 벽에 나를 밀어붙인 채 손을 떨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만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더는 못 숨겨. 이대로 있다간 다혜랑 지훈이가 먼저 알게 될 거야. 차라리 내가 말하는 게 나아.' "도현아, 나 다혜하고 지훈이한테 말할래." 도현의 눈이 커졌다. "안 돼." "이미 다 눈치챘어. 다혜는 목덜미도 봤고, 지훈이는 우리가 손잡은 것도 봤어. 계속 숨기는 게 더 위험해." 그는 한참 나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떨궜다. "……좋아. 다만 조건이 있어." "뭔데." "내가 같이 있을게." "안 돼. 그러면 더 이상해 보여." "그럼 근처에 있을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근처가 어디야." "카페 밖에." "……밖에서 뭐 하는데." "기다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신 티 나게 서 있지 마." "안 그럴게." 전혀 안 그럴 것 같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 학교 앞 카페 구석 자리에 다혜와 지훈이가 나란히 앉았다. 카페 안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원두 볶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평소라면 편안했을 그 냄새가 오늘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다혜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쏘아보고 있었고, 지훈이는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커피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그래서." 다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대로 말해봐. 그 왕세자가 정말 네 남자친구야?"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썼다. "목에 있는 그거, 마킹이지. 오메가라는 것도 진짜지." "……맞아." 다혜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라, 놀라서 나오는 숨이었다. "야, 강서준. 너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 하는 건지 알아?" "알아." "몰라! 오메가라는 거 노출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 표적 되고, 실종되고, 그런 사례들 뉴스에도 안 나오는 거 알잖아. 근데 넌 왕세자랑 연애를 해?" 다혜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카페 안 몇몇 사람이 우리 쪽을 돌아봤다. 나는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지훈이가 조용히 다혜의 팔을 잡았다. "다혜야, 목소리." 다혜가 입술을 깨물고 다시 낮췄다. "……미안. 근데 서준아, 나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알아. 고마워." 침묵이 잠깐 흘렀다. 지훈이가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게. 우리도 처음엔 그냥 오해라고 생각했어. 네가 유난히 예민해진 것도, 목에 붕대 감고 다닌 것도. 근데 지난주에 강의실에서 그 사람이 너 데리러 온 거 보고 알았어." "……봤어?" "응. 눈빛이 이상했어. 딱 봐도 그냥 남자친구가 아니었어." 다혜가 그 말을 받았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왕세자잖아. 그것도 선화왕국. 거기 오메가 관련 법이 얼마나 엄격한지 알아? 뉴스에서만 봐도 소름 돋는데." 지훈이가 나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 사람, 너한테 어떻게 해줘?" 짧은 질문이었지만 무게가 있었다. 나는 대답을 고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가끔 무서워. 너무 강하게 원해서." 그 말이 나오자 다혜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소유욕이 심해.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하고, 어제도 강의실에서……" 말을 하다가 멈췄다. 이 이상은 도현에 대한 배신 같았다. 다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강의실에서 뭐." "……아니야,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얼굴이 아닌데." 나는 대답 대신 커피잔을 만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때 다혜가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심장이 조여왔다. 뭔가 잘못됐다는 감이 왔다. "다혜야, 뭐 찾아." "잠깐만." 몇 초 뒤, 그녀가 화면을 우리 쪽으로 돌렸다. 선화왕국 관련 해외 기사였다.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왕세자, 12명의 여성 알파와의 스캔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기사 아래에는 사진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도현과 나란히 서 있는 여자들의 얼굴이 낯설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자신감 있는 표정들이었다. "……이게 뭐야." "몰랐어?" 다혜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 눈빛에 걱정과 배신감이 섞여 있었다. "기사 날짜 봐. 반년도 안 됐어. 이거 최근이야." 지훈이가 다혜의 휴대폰을 받아 스크롤을 내렸다. 그의 표정이 점점 딱딱해졌다. "서준아." 지훈이가 낮게 불렀다. "이거, 너도 알고 있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컵 안의 커피가 아주 작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내가 만든 진동인지, 손이 떨려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이런 얘기 한 번도 들은 적 없어.' '근데 왜, 이 기사 사진 속 도현 표정이 나한테 짓는 표정이랑 똑같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카페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혜와 지훈이의 얼굴이 흐릿하게 번지는 순간, 창밖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도현이었다. 카페 유리 너머로,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