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말단 킬러의 육아일지

4화

새로운 삶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유치원 등록 첫날, 나는 서류 양식에 보호자 관계를 적는 칸 앞에서 오 분 동안 펜을 든 채 굳어 있었다. 사촌 오빠. 세 글자짜리 단어인데 왜 이렇게 손이 안 나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종이 위에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하다가, 결국 삐뚤빼뚤한 글씨로 '사촌 오빠'라고 써넣었는데, 그 글씨가 어찌나 못생겼는지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왔다. "보호자님, 여기 사인만 해주시면 돼요." 담당 선생님이 재촉했다. 나는 그 순간 사람 서른 명 죽인 놈이 서류 한 장에 이렇게 긴장하는 게 스스로도 웃겨서 속으로 하-, 이거 참 코미디네 싶었다. 총알이 귓가를 스쳐도 심장 한 번 안 뛰던 놈이, 유치원 서류 앞에서 손끝에 땀이 나다니. 이게 인생 아이러니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저기, 성함이 좀 특이하시네요? 관계란에 사촌 오빠라고만 쓰셨는데, 정확한 성함을 좀 더 자세히..." "아, 예. 제가 애 유일한 보호자라서요."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서명을 마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내쉬었다. 이런 걸로 긴장할 놈이었나, 나는. 옛날의 나였다면 서류 따위는 눈길도 안 줬을 텐데, 지금은 유치원 등록 하나에 손끝이 저릴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서아는 새 유치원 첫날부터 나를 놀라게 했다. 놀랍게도 아이가 다른 애들과 잘 어울렸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실 서아가 등원 첫날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예상했고, 그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아침부터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돌렸는지 모른다. 그런데 정작 아이는 교실 문 앞에서 손 한 번 흔들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버렸다. "오빠! 나 오늘 친구 사귀었어!" 하원 시간에 뛰어나온 서아가 그렇게 소리치며 내 다리에 매달렸다. 조그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에너지를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저릿해졌다. 다섯 살짜리가 아빠와 삼촌들을 며칠 사이에 전부 잃었는데도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아직 자기가 뭘 잃었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이해하면서도 그냥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찾아낸 것일지도. 어느 쪽이든, 나는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확실하게 들었다. "친구 이름이 뭔데?" "몰라! 그냥 예뻐서 친구 하자고 했어." 이름도 모르고 친구를 사귀었다는 그 대답이 어찌나 뻔뻔하고 당당한지, 나는 웃음이 터졌다. 사람 죽이는 데는 도가 튼 놈인데, 이 조그만 인간 하나의 논리에는 도무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문제는 요리였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법은 알았지만 밥을 짓는 법은 몰랐다. 총기 분해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고, 사람 몸의 어느 부위를 찌르면 몇 초 안에 절명하는지도 훤히 꿰고 있었지만, 밥에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첫날 저녁, 나는 인터넷에 검색해가며 카레라이스를 만들었다. 레시피에 적힌 대로 감자와 당근을 썰고, 카레 가루를 물에 풀고, 끓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결과물은 카레라기보다는 갈색 물에 감자와 당근이 익사한 무언가에 가까웠다. "오빠, 이거 좀 이상해." 서아가 숟가락으로 그 물체를 뒤적이며 정직하게 평가했다. 나는 그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숟가락을 넣었다 빼면 걸쭉하게 흘러내려야 할 카레가, 그냥 물처럼 주르륵 흘러버렸으니까. 감자는 형태가 무너져서 어디가 감자고 어디가 당근인지 구분도 안 됐다. "맛은 어때?" "맛은... 괜찮은데, 색깔이 이상해." 서아는 그 말을 하면서도 결국 몇 숟갈을 먹었는데, 나는 그게 더 마음이 아팠다. 다섯 살짜리가 이상한 걸 억지로 먹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다음엔 이해를 해보려 했다. 요리 유튜브를 세 개나 돌려보고, 계량스푼까지 사서 정확히 재고, 불 조절도 신경 썼다. 심지어 노트에 순서를 적어가며 만들었는데도 결과물은 매번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실패했다. 문제는 애초에 마늘과 생강을 구분하지 못하는 놈이 요리를 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느 날은 소금과 설탕을 헷갈려서 국이 달았고, 어느 날은 불을 너무 세게 해서 냄비 바닥이 새까맣게 탔다. 연기가 부엌을 가득 채웠을 때 서아가 놀라서 뛰어나온 적도 있었다. "오빠, 불 났어?!" "아니야, 그냥 좀... 탄 거야." 나는 창문을 다 열어놓고 연기를 빼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씨발, 화재경보기 울릴 뻔했잖아. 사람 열 명 상대해도 땀 한 방울 안 나던 놈이 냄비 하나에 이렇게 진땀을 뺀다는 게 참 웃기지도 않았다. 일주일 동안 서아는 라면과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버텨야 했다. 나는 그 사실이 스스로도 한심해서 밤마다 이 씨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직에서는 몇백억짜리 거래도 처리하고 사람 목숨도 손바닥 뒤집듯 처리했는데, 다섯 살짜리 애 하나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아니, 자존심보다는 죄책감이 더 컸던 것 같다. 서아는 불평 한 번 없이 삼각김밥을 먹으면서도, 가끔 "엄마가 해준 밥은 다른 거였는데" 하고 중얼거렸는데, 그 말이 내 가슴을 후벼팠다. 빨래도 문제였다. 서아의 하얀 원피스를 검은 티셔츠와 함께 세탁기에 넣었다가, 다음 날 아침 회색으로 물든 원피스를 발견하고서 나는 십 초쯤 그 옷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색분리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던 나였다. 옷이란 그냥 세탁기에 넣고 세제만 부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거... 이거 새 원피스인데." 서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옷을 붙잡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나를 올려다보는데, 나는 그 순간 사람 열댓 명을 순식간에 처리하던 실력으로도 세탁기 색분리 하나를 못 했다는 게 참 인생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가 새로 사줄게. 더 예쁜 걸로." "이거 아빠가 사준 건데."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준 옷이라는 걸 몰랐던 나는, 그냥 옷장에 걸린 옷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었다. 서아는 결국 그 회색으로 물든 원피스를 한참을 붙잡고 훌쩍이다가, 내가 옆에 앉아서 등을 두드려주자 조금씩 울음을 그쳤다. "그 옷은... 색깔만 변한 거지, 없어진 게 아니야. 계속 옷장에 넣어둘까?" "...응." 나는 그날 이후로 세탁기 사용법을 인터넷으로 세 시간 동안 검색했다. 흰옷과 색깔옷을 구분하는 법, 세제 종류, 온도 설정까지. 사람 죽이는 매뉴얼보다 빨래 매뉴얼을 더 열심히 외운 셈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밤마다 서아가 잠들기 전에 아빠 얘기를 물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처음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얼버무리기만 했다.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어" 같은 뻔한 말로 대충 넘기려 했는데, 서아는 그런 대답에는 만족하지 않았다. 며칠 지나면서 아이가 진짜로 궁금해하는 게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했다는 확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 죽었는지, 왜 이제 못 만나는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아빠가 나 좋아했어?" "아빠가 나 예뻐했어?"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아빠가 서아를 제일 좋아했어. 서아가 태어난 날, 아빠가 처음으로 사무실에서 웃었다고 들었어." 나는 정확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서아가 그 말을 듣고 편안한 얼굴로 잠드는 걸 볼 때마다, 이런 게 거짓말이라도 나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나는 그 남자가 웃는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늘 무표정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이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아이에게 그런 진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아이가 기억할 아버지는, 자기를 사랑했던 사람이면 되는 거였다. "오빠는 아빠 얘기 많이 알아?" "조금 알아." "더 얘기해줘." 그럴 때마다 나는 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냈다. 아버지가 서아를 위해 인형을 사러 갔다가 길을 잃었다는 얘기, 서아가 처음 걸었을 때 너무 좋아서 사람들한테 자랑했다는 얘기. 다 지어낸 이야기였지만, 서아는 그 얘기들을 진짜처럼 믿었고, 그 얘기를 들으며 잠들었다. 그렇게 두 주쯤 지났을까, 박기범이 오랜만에 다세대주택을 찾아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그가 검은 봉투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돈은 문제없냐." "그거보단, 다른 게 문제죠." 나는 카레 재료가 담긴 봉투를 흔들며 반쯤 자조적으로 웃었다. "애 밥을 못 챙겨요, 제가." 박기범은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잠시 후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을 그렇게 잡던 놈이 카레 하나를 못 만든다니." "저도 이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어요." "애는 어디 갔냐?" "낮잠 자요. 유치원 다녀오면 피곤한지 두 시간씩 자더라고요." 박기범은 집 안을 슬쩍 둘러보더니, 부엌 쪽에 쌓여있는 삼각김밥 봉투들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뭐냐. 애가 이거만 먹고 살아?" "...노력 중입니다." "노력이 아니라 방치 아니냐, 이건." 그 말이 좀 아프게 박혔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봉투를 정리했다. 박기범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반찬가게 명함이었다. "여기 반찬 배달시켜. 애한테 삼각김밥만 먹이지 말고." "...감사합니다." 나는 그 명함을 받으면서 속으로 좀 창피했다. 사람을 그렇게 잘 죽이던 놈이 반찬 배달 명함 하나 받고 이렇게 고마워하다니.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을 굴복시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애는 잘 지내냐?" "유치원도 잘 다니고, 친구도 사귀고. 저보다 훨씬 잘 적응해요." "다행이네." 박기범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침묵했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다 참는 기색을 읽었다. 아마 조직 쪽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은 말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조직 쪽은 괜찮은 거죠?" "...아직은." 그 짧은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은. 이라는 말은 곧 뭔가가 곧 달라질 거라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더 묻고 싶었지만, 박기범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애 잘 챙겨라. 별일 없으면 다음 주에 또 올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오직 살아남는 법만 배웠지, 누군가를 지키면서 함께 사는 법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서투름이, 아마 이 새로운 삶에서 나를 가장 위태롭게 만들 약점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박기범이 남긴 "아직은"이라는 그 짧은 말이, 문이 닫힌 뒤에도 오랫동안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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