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헬스장 여신이 여왕님이라니

2화

카페 창가 자리, 하은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커피를 홀짝였다. 본과 1학년, 시험 기간이 코앞이었다. 병리학 교재는 두께만으로도 위압적이었고, 형광펜으로 그어놓은 문장들이 화면 속 활자와 뒤섞여 눈앞이 아득했다. 또각. 또각. 키보드 소리가 카페 안을 채웠다. 창밖으로는 오후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지만 하은의 머릿속은 온통 시험 범위로 가득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도윤이 자신의 손을 살짝 만지는 감각에 자꾸만 집중력이 흩어졌다. — 공부하는데 왜 만져. — 그냥. 손이 예뻐서. 하은은 피식 웃었다. 예전 같으면 손이 두꺼워졌다고, 손가락도 살쪘다고 여겼을 텐데. 지금은 그 말이 그저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 진심인데. 도윤은 그렇게 말하며 하은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그 손길에는 어떤 계산도 없어 보였다. 그저 만지고 싶어서 만지는 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했다. 연애를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 하은은 도윤의 앞에서만큼은 몸에 대한 자책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다. 도윤은 그녀의 살찐 팔뚝을 쓰다듬으며 “부드럽다”고 했고, 둥글어진 뺨을 감싸며 “귀엽다”고 했다. 처음엔 의심스러웠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혹시 배려로 하는 말은 아닌지, 하은은 몇 번이고 속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그 말들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한 번은 하은이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셔츠 단추가 예전보다 뻑뻑하게 잠기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다가온 도윤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 왜, 예쁜데. — 살쪘잖아. — 살찐 게 왜 나쁜 건데. 그 짧은 반문이 하은의 가슴 어딘가를 툭 건드렸다. 살찐 게 왜 나쁜 건데. 그 말을 곱씹으며 하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밤, 하은의 방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물들였다. 하은이 이불 속에서 자신의 배를 슬쩍 가렸다. — 여기, 좀 많이 나온 것 같지 않아? 도윤은 그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그리고 배 위에 손을 얹었다. — 나오면 어때. 만지면 따뜻하고 좋은데. 하은은 숨을 삼켰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도윤의 눈빛에는 정말로 그 몸을, 그 존재 자체를 원하는 열기가 담겨 있었다. 손바닥의 온도가 배를 타고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진짜로... 나를 이대로 좋아하는구나.' 그 확신이 하은의 안에서 뭔가를 조용히 풀어놓았다. 오랫동안 옥죄고 있던 자기혐오의 매듭이 스르르 느슨해지는 감각이었다. 하은은 도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몸을 의식하지 않고 잠드는 밤이었다. 그날 이후 하은은 조금씩 여유를 찾았다. 몸에 맞는 옷을 사고, 거울 앞에서 오래 머무는 시간도 줄었다. 예전에는 옷가게에 들어가면 항상 큰 사이즈부터 뒤졌지만, 이제는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먼저 보고 나서 사이즈를 골랐다. 그 작은 차이가 스스로에게도 낯설었다. 대신 새로운 종류의 호기심이 생겼다. 며칠 뒤, 늦은 밤. 하은은 혼자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시험이 끝난 다음 날이라 오랜만에 여유로운 밤이었다. 대학 커뮤니티 게시판을 훑다가 우연히 눈에 걸리는 게시물이 있었다. [여자친구가 나를 지배하는 관계, 다들 어떻게 생각해?] 제목이 노골적이었다. 하은은 무심코 클릭했다. 그리고 곧 다양한 링크와 댓글들이 쏟아졌다. 도미넌트, 서브미시브, 페미돔이라는 낯선 단어들이 화면을 채웠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었다. 이런 게시글이 대학 커뮤니티에도 올라오는구나, 하는 심드렁한 흥미. 하지만 스크롤을 내릴수록 묘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사진 몇 장, 짧은 후기 글, 커뮤니티 특유의 은어들. '이게... 뭐지.' 손끝이 저릿했다. 하은은 화면을 끄려다 멈췄다. 다시 스크롤을 내렸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몇 번이고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한 게시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는 내 발밑에서 가장 안정을 느낀다고 했다.] 하은의 시선이 그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뜬금없이 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을 때의 표정, 자신의 몸을 조심스레 만질 때의 눈빛.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단순한 애정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하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아니라고, 그건 그냥 다정한 남자친구일 뿐이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 한구석에는 작은 균열이 생겨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낯선 흥미가 스며들었다. 하은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까 그 게시글을 즐겨찾기에 몰래 담아두었다. 다음 날, 하은은 도윤을 만났을 때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그를 관찰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을 때, 시선을 맞출 때, 그리고 자신이 무심코 명령하듯 말할 때 도윤이 짓는 표정을. 카페에서 자리를 잡을 때도 그랬다. 하은이 창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 저기 앉자. — 응. 도윤은 곧바로 하은이 가리킨 자리로 걸어갔다. 그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하은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내가 이제야 보게 된 걸까. — 이거 좀 들어줄래? 하은이 무거운 전공 서적을 내밀며 말했다. 명령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순간적으로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받아들었다. — 당연하지. 그 대답이 지나치게 빠르고, 지나치게 기뻐 보였다. 하은은 그 순간 도윤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무언가가 있었다. 순종이라고 하기엔 과하고, 배려라고 하기엔 미묘하게 다른 감정. — 왜 그렇게 봐? 도윤이 물었다. 하은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 아니, 아무것도.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젯밤 화면 속에서 읽었던 문장들, 그 낯선 단어들이 도윤의 얼굴 위로 겹쳐졌다. 하은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것을 도윤은 알아채지 못했다. 카페를 나서는 길, 도윤이 하은의 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며 어깨에 멨다. 그리고 하은의 손을 잡았다. 평범한 하루의 끝처럼 보였지만, 하은의 머릿속에는 이미 낯선 질문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