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도윤의 방, 늦은 오후의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먼지 알갱이들이 그 빛줄기 속에서 느리게 떠다녔다. 하은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도윤의 노트북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다. 과제 이야기가 끝난 뒤 자연스럽게 이어진 잡담이었다.
도윤이 커피를 한 잔 더 타 오겠다며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매트리스가 살짝 눌렸다. 하은은 그가 앉는 순간의 무게감, 몸에서 풍기는 익숙한 섬유유연제 냄새를 느끼며 문득 딴생각에 잠겼다.
최근 며칠, 하은의 검색 기록은 평소와 달랐다. 새벽마다 휴대폰 화면의 빛이 얼굴을 비췄고, 손가락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 위를 오갔다. 커뮤니티 게시판, 낯선 은어들, 누군가의 고백 같은 글들. 그 안에는 하은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관계의 방식들이 담겨 있었다. 처음엔 흥미로 시작한 탐색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 너는 연애할 때 뭘 좋아해?
하은이 대뜬금없이 물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지만, 목소리에는 미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도윤은 살짝 당황했다.
— 갑자기?
— 그냥. 알고 싶어서.
하은은 노트북을 살짝 덮으며 도윤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 도윤은 잠시 생각하다 어색하게 웃었다. 웃음 끝이 조금 흔들렸다.
— 음... 네가 시키는 거 하는 거? 그런 거 좋아하는 것 같아.
말해놓고 도윤 자신도 놀란 눈치였다. 무의식중에 나온 대답이었다. 그는 곧바로 뭔가 잘못 말했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하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 시키는 거?
— 아니, 그냥... 네가 뭘 하라고 하면 그게 좋더라고. 이상하지.
도윤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커피잔을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하은은 그 말을 곱씹었다. 최근 며칠간 뒤적였던 게시물들, 댓글들, 낯선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누군가의 글이 다시 떠올랐다. '처음엔 스스로도 몰랐다. 그저 시키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하은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테스트해볼까.'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다. 하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뻗어 도윤의 턱을 살짝 들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 서늘함이 도윤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그는 숨을 멈췄다.
— 그럼 오늘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
도윤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 ...뭘?
하은은 잠시 고민했다. 너무 급하게 나가면 도윤이 놀랄 것 같았다. 그녀는 신중하게,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게시판에서 읽었던 조언 하나가 떠올랐다. '작은 것부터. 상대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처럼 느끼게.'
— 내 발 좀 주물러줄래?
최대한 가볍게 물었다. 마치 흔한 애정 표현을 요청하듯. 목소리 끝을 살짝 늘어뜨리며, 별거 아니라는 듯 웃음까지 섞었다.
도윤은 잠깐 멈췄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다 순순히 하은의 발치로 몸을 낮췄다. 침대 아래로 무릎을 꿇듯 앉는 자세가 되었다. 하은의 발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손바닥이 발등을 덮는 순간, 그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손끝이 발등을 지나 발바닥으로 향할 때, 도윤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졌다. 부끄러움과 설렘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자신의 표정을 감추려 했지만, 붉어진 귀는 감출 수 없었다.
— 이렇게?
— 응, 좋아.
하은은 소파에— 아니, 침대에 몸을 편히 기대며 눈을 반쯤 감았다. 도윤의 손길이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웠다. 지나치게, 라고 느껴질 만큼. 손가락 하나하나가 발가락 사이를 지날 때마다 미세하게 떨렸고, 압력은 일정하지 않았다. 마치 무엇이 정답인지 몰라 조심스레 헤매는 손길 같았다.
'단순히 마사지가 아니야.'
하은은 슬쩍 눈을 뜨고 도윤을 내려다보았다. 도윤은 그녀의 발을 감싼 채 시선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이 붉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어깨가 낮게 굽어 있었다. 평소의 도윤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자세였다. 학교에서는 늘 담담하고 정돈된 태도를 유지하던 그가, 지금은 발치에 몸을 낮추고 시선조차 들지 못했다.
— 도윤아.
— ...응?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 좋아?
도윤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이상하게... 편안해.
말끝이 흐려졌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억지로 언어로 옮기려는 듯한 어투였다.
하은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확신이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게시판에서 읽었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내 발밑에서 가장 안정을 느낀다고 했다.' 그때는 그저 낯선 이의 고백처럼 읽었던 문장이,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진짜였네.'
가슴 어딘가가 서늘해지면서도 동시에 뜨거워지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은은 발을 조금 더 그의 손 위로 밀어 넣었다. 도윤은 순응하듯 자세를 낮추고 더 정성스레 발가락을 감쌌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 계속해줄래?
— ...응.
도윤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그 자신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발등을, 발바닥을, 발가락 사이사이를 반복해서 어루만졌다. 마치 그 행위 자체에 이유가 필요 없다는 듯이.
하은은 그 순간을 오래 기억해두기로 했다. 도윤의 굽은 어깨, 붉어진 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스스로 뱉은 말 — "네가 시키는 거 하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심스레 다음 계획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놀라지 않게. 하지만 확실하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밖은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윤은 여전히 그녀의 발을 붙잡은 채였지만, 손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 이제 그만해도 돼.
하은이 발을 슬쩍 빼며 말했다. 도윤은 순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 그것을 감추듯 헛기침을 했다.
— 어, 그래. 손 아프지?
— 아니, 괜찮아. 고마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어색함과 낯섦이 뒤섞인 침묵이었다. 도윤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하은은 그 반응을 조용히 관찰했다.
그날 밤, 도윤을 배웅하고 혼자 방에 남은 하은은 다시 휴대폰을 열었다. 방 안의 불을 끄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화면의 빛만으로 얼굴을 밝혔다. 검색창에 손가락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단어들이었다. 화면을 스크롤하는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낯선 세계의 문 하나가, 이제 막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