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부터 나는 밤마다 요람 안에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전생에서 읽었던 '백수 환생기'는 완결까지 다 본 작품은 아니었다. 중반쯤인가 어디쯤인가 하차했던 것 같다. 정확히는, 주인공이 세 번째 회사에서 잘리고 네 번째 아르바이트를 구하던 시점까지였나. 그쯤 즈음 다른 웹소설에 눈이 돌아가서 그대로 놓아버렸다. 그래도 강서연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유독 강렬해서 인상에 남아 있었다. 서브 캐릭터치고는 분량이 꽤 나왔던 인물이었으니까.
원작 속에서 강서연의 강제 혼인은 어느 상단주의 요청에서 시작됐다. 석강호가 과거의 죄를 덮기 위해 상단과 거래를 하면서, 서연을 그쪽 후계자의 정략혼 상대로 넘기는 방식이었다.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도훈이 아직 어린 나이였다는 서술이 있었다. 그 서술 한 줄 때문에 지금 이렇게 밤마다 잠도 안 자고 기억을 파헤치고 있는 거다. 웃기지도 않는다. 전생엔 마감 기한도 이렇게 절박하게 지킨 적 없었는데.
지금이 그 시기와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낮 동안 나는 표면적으로 평범한 두 살짜리처럼 지냈다. 걸음마를 연습하는 척, 손 그림을 그리는 척, 밥투정을 하는 척. 서연이 밥을 먹여줄 때는 일부러 숟가락을 밀어내며 어리광을 부렸다. 사실 마력을 아끼려면 이런 잔재주에도 은근히 신경을 써야 했다. 두 살짜리가 갑자기 너무 똘똘하게 굴면 곤란하니까.
"오늘도 안 먹을 거야?"
서연이 낮게 웃었다. 며칠 전 복도에서 봤던 그 눈물의 흔적은 이제 얼굴에 없었다. 대신 이렇게 가끔, 나에게만 짧게 웃어주는 순간들이 늘어갔다. 그 웃음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지켜낼 방법이 없다는 무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모가 먹여주는 게 좋아서 그러는 거지?"
서연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입을 벌렸다. 숟가락이 들어왔다. 미역국 냄새가 났다. 별거 아닌 순간인데,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전생에 이런 걸 받아본 적이 있었나. 기억이 잘 안 났다.
이런 순간들이 조금씩 쌓이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밤이 되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됐다.
요람에서 몰래 일어나 앉아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아주 조금씩, 티가 나지 않을 만큼만. 촛불 하나를 켜고 끄는 정도의 연습을 매일 반복했다.
처음엔 촛불 심지에 불도 제대로 못 붙였다. 손끝에서 마력이 뭉치는 감각 자체가 낯설었다. 마치 물속에서 손을 뻗는 것처럼, 힘을 준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열흘쯤 되어서야 겨우 심지에 작은 불씨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조금씩 빨라졌다. 셋을 세면 붙고, 둘을 세면 붙고,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바로 붙었다.
[마력 제어 숙련도 상승]
알림이 뜰 때마다 묘한 성취감이 들었다. 전생에는 게임 한 번 제대로 끝까지 깨본 적 없는 인생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성장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있었다. 레벨업 알림 같은 게 눈앞에 뜨는데 안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육성 게임에 그렇게 매달리는구나 싶었다.
문제는 이 성장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터져 나올 때마다 아버지의 의심이 짙어진다는 것.
며칠 전에도 낮잠 자던 중 무의식적으로 손끝에서 작은 불씨가 튀었던 모양이다. 유모가 놀라서 아버지에게 보고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다행히 아이들이 가끔 그런다며 넘어갔지만, 두 번은 안 통할 이야기였다.
균형을 잡아야 했다. 강해져야 하지만, 들키면 안 된다. 서연을 지켜야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세 가지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
어느 밤, 촛불 연습을 하다가 서재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였다.
나는 하던 연습을 그대로 멈췄다. 손끝에 모아둔 마력이 스르륵 흩어졌다. 요람 난간을 붙잡고 조심스레 일어나 문틈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두 살짜리 다리로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싶었다.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다. 상대 목소리는 낯설었다. 걸걸하고 낮은, 나이가 꽤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이야기는 아직 이릅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때가 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강 상단 쪽에는 조금 더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십시오."
강 상단.
심장이 덜컥했다.
원작에서 언급됐던 그 이름이 맞다면, 시나리오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가 강 상단주의 대리인인지, 아니면 다른 중개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아직 이르다'고 미루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미룬다는 건, 결국 언젠가는 진행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요람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손끝이 차가웠다.
생각보다 시간이 없다.
두 살짜리 몸으로, 아직 걷는 것도 서툰 몸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아버지 앞에 나가서 서연을 팔지 말라고 애원할 수도 없다. 그런다고 들어줄 사람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 집안의 논리는 이익과 손해로만 움직였다.
답은 아직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강 상단이라는 이름이 다시 들리는 순간, 그때는 이미 늦을 거라는 것.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촛불 연습이 아니라 다른 것을 시도했다.
손바닥 위로 작은 빛의 구슬을 하나 만들어냈다. 원작에서 언급된 초급 마법,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한 형태였다. 사실 성공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견딜 수 없어서 무작정 손을 뻗은 거였다.
처음엔 흔들리기만 했다. 손끝에서 마력이 새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다시 집중했다. 이미지가 필요했다. 손바닥 위에 아주 작은 태양이 떠 있다고, 그렇게 상상했다.
구슬이 흔들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작고, 희미하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빛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떠 있었다. 두 살짜리 몸으로 이걸 해냈다는 사실에 순간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면 아버지 앞에서 재롱 부린다고 우겨도 될까.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상급 술식 시도 감지 - 신체 부담 경고]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렸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손끝에 힘을 더 실었다.
경고 문구가 뜨는데도 멈추지 않은 건, 어쩌면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강 상단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뭔가 조급해졌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해두지 않으면, 나중엔 정말 늦을 것 같았다.
구슬이 밝기를 더해가는 순간,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