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한부 마법사의 각성

2화

오후 수업이 끝나고 의무실에 들렀다. 정기 검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병명이 붙은 순간부터 내 삶은 카운트다운이 됐고, 학교는 그 숫자를 정기적으로 재확인해주는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셈이었다. 친절하기도 하지. 담당 치유사는 내 팔에 마력 측정 부적을 붙이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몇 년째 보고 있으니 이제는 표정 사전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묘하게 찡그린 이마는 나쁜 소식,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그나마 나쁘지 않은 소식. 오늘은 전형적으로 이마가 찡그려진 쪽이었다. "수치가 조금 떨어졌네요."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가요?"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는 말은 늘 걱정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의사들이 저 말을 쓸 때는 대체로 진짜 상태를 축약해서 전달하는 거였고, 그 축약본은 항상 원본보다 나빴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처방 받은 약을 챙겼다. "이번엔 양이 좀 늘었네요." "체질이 적응을 못 해서요. 조금씩 늘려가는 거예요." 적응을 못 하는 건 약이 아니라 내 몸 쪽이었다. 병에 걸리고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는데, 약국에 가는 대신 학교 의무실에서 공짜로 받는다는 거였다. 시한부 인생에도 알량한 위안거리가 필요했다. 나는 종이봉투에 담긴 약을 교복 안주머니에 넣으며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걸 밖에서 샀으면 한 달 용돈이 그대로 날아갔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위로가 됐다. 조금은. 의무실을 나오다가 복도 끝에서 박두석 아저씨를 봤다. 등을 돌리고 서 있었는데 딱 나를 발견한 그 순간,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못 본 척한 게 아니라 확실히 봤다. 봤는데 피했다. 눈이 마주친 그 짧은 순간에 아저씨 얼굴에 스친 표정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당황,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회피. 순서까지 정확했다. "아저씨." 불러봤지만 걸음이 더 빨라졌다. 나이가 있으신 분이 저렇게 빠르게 걸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엔 그냥 몸이 안 좋으신가 했는데, 계속되니 이유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번을 마주쳤는지 세어본 적은 없지만 대략 다섯 번은 넘었을 거다. 식당에서, 운동장에서, 복도에서. 매번 나를 보면 방향을 틀었다. 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겼다. 세 번째부터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다섯 번째부터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넘겼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걸렸다. 다만 그 이유를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물어봤다가 정말 안 좋은 답이 나올까 봐. 어차피 물어볼 새도 없이 그는 복도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뭔가 물어봐야 할 게 있다는 느낌은 드는데,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게 제일 답답했다. 마치 시험지에 분명 아는 문제가 나왔는데 답이 떠오르지 않는 그런 기분이었다. 남은 시간이 애매하게 붕 떴다. 다음 수업까지 한 시간, 기숙사로 돌아가기엔 아깝고 딱히 할 일도 없는 시간. 그럴 때 학생들이 흔히 가는 곳이 도서관이었지만 나는 발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도서관은 조용해서 좋지만 조용한 만큼 생각할 시간도 많아진다는 게 문제였다. 생각이 많아지면 결국 몸 상태로 되돌아왔고, 몸 상태를 생각하면 우울해졌고, 우울해지면 또 몸이 나빠진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서 되도록 생각을 안 하는 쪽을 택했다. 청운 마법학교엔 필요의 방이라는 게 있다. 정확한 위치가 정해져 있지 않고, 문을 찾는 사람이 진짜로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만 나타난다는 전설 같은 공간. 나는 그 소문을 믿는 편은 아니었다. 학교에는 그런 종류의 도시전설이 열 몇 개쯤 돌아다녔고, 대부분은 신입생 놀리기용이었다. 지하실에 봉인된 마족이 있다든가, 밤 열두 시에 도서관 서가가 움직인다든가. 필요의 방도 딱 그 정도 신빙성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이 자꾸 서쪽 탑 쪼그만 복도로 향한 이유는 나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거기 있으면 뭐든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대." 입학하던 해에 동기 하나가 흥분해서 떠들던 말이 떠올랐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애였는데, 그 대사만은 이상하게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그 애는 눈을 반짝이며 자기가 직접 들은 거라고, 3학년 선배가 거기서 시험 문제를 얻어냈다고, 아니 정확히는 시험 문제가 아니라 시험 문제를 알 수 있는 무언가를 얻어냈다고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했다. 나는 그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거기 가서 튼튼한 몸 하나 달라고 하면 되겠네. 진짜로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우스갯소리였다. 그 애는 웃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럼 진짜 가봐" 라고 답했던 게 기억난다. 그때는 그 진지함이 우스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조금 소름이 돋는다. 서쪽 탑 복도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수업 시간이라 학생들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발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내 신발 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오는데, 마치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며 똑같이 걷는 듯한 착각이 잠깐 들었다. 뒤돌아봤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혼자 지레 놀란 게 민망해서 헛기침을 하고 다시 걸었다. 복도 끝에 낡은 벽이 하나 있었다. 아무 특징도 없는 그냥 벽. 돌로 쌓인 부분이 세월에 색이 바랬고, 군데군데 이끼 비슷한 얼룩도 있었다. 딱히 문이 생길 것처럼 신비로운 기운이 도는 벽은 아니었다. 오히려 관리가 좀 부실한 창고 벽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 벽 앞에 서서 잠깐 웃었다. 내가 지금 뭘 바라고 여기 서 있나. 병을 고쳐줄 방이 있다면 진작 학교에서 홍보했을 거다. 등록금 낼 때 안내문에 한 줄 정도는 적혀 있었겠지. '필요의 방 이용 가능, 단 신뢰도는 별점 두 개'. 그런데도 벽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몸이 나았으면 좋겠다. 마력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누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세 가지 소원을 순서대로 되뇌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좀 우스웠다. 신에게 비는 것도 아니고 벽에다 대고 뭘 하는 건지. 그런데 이 우스운 행동을 관성처럼 몇 번이나 곱씹었다. 몸이 나았으면. 마력이 있었으면. 누나를 지킬 수 있었으면. 세 문장을 돌림노래처럼 되풀이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에 문이 생겼다. 진짜로.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게 지금 실제로 벌어지는 일인지, 아니면 약을 잘못 먹어서 헛것을 보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방금 먹은 약 성분표를 머릿속으로 되짚어봤지만 헛것을 보게 하는 부작용은 없었다. 있었어도 의무실에서 그런 걸 알려줄 리 없었겠지만. 문은 낡은 나무 문이었고, 손잡이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손잡이 모양은 학교 다른 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동인지 놋쇠인지 모를 재질에, 오래된 세공 무늬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문틀 위쪽에는 아무 표식도 없었다. 이름도, 경고문도, 아무것도.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복도 저편까지 눈을 훑었지만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새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문을 두드려볼까, 그냥 돌아갈까 잠깐 고민했지만 사실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손이 손잡이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으니까. 머리로는 온갖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게 함정이면 어쩌지, 이게 진짜라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나, 애초에 대가 없이 뭔가를 얻는다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나. 하지만 손은 이미 그 모든 계산을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마음보다 먼저 답을 낸 셈이었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이, 이상하게도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끝에서부터 팔뚝까지 서늘한 감각이 번져 올라왔다. 겨울날 쇠난간을 잡았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차가움이었다. 그건 그냥 온도의 문제였는데, 이건 뭔가 다른 게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문 너머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바람인지, 숨소리인지, 아니면 그냥 내 귀가 만들어낸 환청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손잡이를 놓지 못한 채로,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마지막 갈등 속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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