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한부 마법사의 각성

5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몸이 이상하게 가볍다는 거였다. 늘 사지에 짐을 얹은 것처럼 무겁던 감각이 사라졌다. 처음엔 그게 좋은 신호인 줄 알았다. 천장을 보고 있는데도 초점이 이상하게 빨리 잡혔다. 원래라면 눈을 뜨고도 한참을 흐릿한 시야와 씨름해야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데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던 몸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남의 몸을 빌려 입은 것 같았다. 방은 의무실이었다. 창밖으로 저녁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옆 침대에는 박두석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든 게 아니라 그냥 넋을 놓고 있는 자세였다. 등이 살짝 굽어 있었는데, 그 각도가 평소 그가 취하는 자세와는 달랐다. 뭔가를 오래 견디고 있는 사람의 등이었다. 목이 말라서 침을 삼켰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목구멍이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게 반응했다. 이물감 하나 없이. "아저씨." 목소리를 냈는데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그가 고개를 확 들었다. 눈이 붉게 부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눈 밑에 그늘이 지도처럼 퍼져 있었고, 수염도 며칠은 못 깎은 듯 거칠었다. "정신 들었냐." "저 얼마나 잤어요?" "이틀." 짧은 대답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보려다 팔에 힘이 이상하게 들어가는 걸 느꼈다. 원래 내 팔이라면 상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져야 했다. 팔뚝이 후들거리고, 이마에 식은땀이 배고, 목 뒤로 열이 오르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상체가 그냥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났다. 이상했다. 좋은 게 아니라 이상했다. "몸이 좀 이상해요." "···의사가 그러더라. 수치가 다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고." 박두석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치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처럼 말투가 낮고 무거웠다.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좋은 거였으면 내가 이 얼굴로 앉아있겠냐."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몸이 나아졌다는 게 순수한 축복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대가 없이 얻는 건 없다는 걸 이 나이까지 배웠으면 충분했다. 시장에서도 공짜로 주는 물건은 늘 뒤에 뭔가가 붙어 있었다. 유효기간이 지난 재고거나, 미끼상품이거나. 이번엔 뭐였을까. "그 구슬은요." "없어졌다. 네 몸속으로 들어갔어." 담담하게 던지는 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손등의 핏줄, 손가락 마디, 손톱 밑까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겉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 쪽에서 뭔가가 미묘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 안에 다른 심장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박동이 두 개로 겹쳐 뛰는 것 같은, 아주 미세한 이질감이었다. 손바닥을 가슴에 갖다 대봤다. 심장은 하나였다. 그런데 그 하나가 평소와 다른 리듬으로 뛰는 느낌이 계속 남아 있었다. '놀랐느냐.' 귓속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목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정도면 놀랐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고, 침대 시트를 붙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너 진짜 내 안에 있는 거야?" 소리 내서 물었더니 박두석이 흠칫했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들리는구나." "들려요. 아저씨도 들려요?" "아니. 나는 안 들려. 다만 그게 이 정도로 널 삼키고 있는지는 몰랐다." 삼킨다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내가 뭔가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들렸으니까. 그런데 내 안에서 목소리가 또 이어졌다. 이번엔 조금 더 또렷하게, 마치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삼키다니. 나는 나눈다고 했다. 힘을, 시간을, 목숨을.' "나눈다는 게 무슨 뜻인데. 그거 결국 내 걸 떼서 준다는 소리 아니야?" '셈이 빠르구나. 그렇다. 하나 그게 그렇게 나쁜 셈은 아닐지어다.' "그럼 대가는 뭔데." 대놓고 물었다. 협상은 어릴 때부터 배운 거였다. 시장에서 흥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값을 부르면 반드시 깎아야 하고, 조건을 던지면 반드시 되받아쳐야 한다.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원리는 똑같았다. '대가는 나중에 말하마. 지금은 낫는 것에 감사할지어다.' "그게 말이 되나요? 대가도 모르고 이미 받아버린 건데." '거절할 기회는 이미 지나갔느니라.' 뭔가 억울했지만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정신을 잃은 채로 계약이 체결됐으니 그 계약서를 다시 들여다볼 방법이 없었다. 서명도 안 했는데 이미 도장이 찍혀버린 셈이었다. 이런 걸 사기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싶었다. "야, 적어도 뭘 가져갈 건지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거 완전 불공정 거래잖아."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 어딘가에서 낮은 웃음소리 같은 게 스치듯 지나갔다. 사람이 웃는 것과는 결이 다른, 어딘가 뒤틀린 울림이었다. 박두석이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낮게 말했다. "청운 학교 쪽에도, 협회 쪽에도 이 일은 아직 말하지 않았다." "왜요?" "말하는 순간 네가 실험 대상이 될 거다.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협회 쪽 사람들이 이런 걸 보면 나를 사람으로 대할지, 아니면 새로 발견된 검체로 대할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뭔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가 단순히 나를 위한 배려만은 아닌 것 같았다. 눈빛에 뭔가 감춘 게 있었다. "아저씨, 그 구슬 뭔지 원래 알고 계셨죠." 대답이 없었다. 그게 대답이었다. 나는 한 발 더 밀어붙였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나한테 미리 말 안 했어요." "···말했으면 네가 그걸 만졌겠냐." 그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미리 알았으면 절대 손대지 않았을 거다. 아니, 애초에 그 방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이미 몸속에 들어앉은 뒤였다. "그럼 이제 나 어떻게 되는 건데요." "···모른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박두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늘 침착하고, 늘 계산적이던 사람이 지금은 눈앞의 상황을 계산조차 못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누나가 소식을 듣고 뛰어왔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내 상태를 확인하고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숨이 거칠었고,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였다. 나를 보자마자 손으로 내 얼굴을, 팔을, 어깨를 차례로 만져보며 확인했다. "괜찮은 거야? 진짜 괜찮은 거야?" "괜찮아.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어." "더 좋아졌다는 게 무슨 소리야." 누나의 눈빛이 순식간에 의심으로 바뀌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하려다 박두석 쪽을 슬쩍 봤다. 그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아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온전한 사실도 아니었다. 누나는 그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그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가, 곧바로 다른 걱정이 밀려왔다. 몸속에 있는 이 존재가 언젠가 원하는 걸 말할 텐데, 그게 나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누나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그 온기가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내 몸속에 낯선 게 하나 들어앉아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익숙했던 것들조차 새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의사가 그러더라. 네 회복 속도가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고. 그게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누나의 목소리에도 확신이 없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내 안에 뭔가가 있고, 그게 말을 걸고, 나눈다고 하면서 정작 대가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말로 풀어야 하나. "당분간 내가 여기 있을게." "학교는 어쩌고." "그게 지금 문제야?" 누나가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그 기세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누나의 강단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필요할 때는 세상 무엇보다 단단했다. 창밖으로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을 때, 머릿속에서 그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네 누이가 참 강하구나. 곧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목소리는 뭔가에 가로막힌 듯 뭉개지며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뚝 하고 끊겼다. 나는 그 침묵이 대답보다 훨씬 무섭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옆에서 잠든 누나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쓸모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게 어떤 쓸모인지, 어떤 방식으로 쓰일 건지, 물어볼 상대는 이미 침묵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불을 코까지 끌어당기며 생각했다. 이 몸속에 들어온 게 대체 뭘 원하는 건지, 그리고 그게 원하는 게 정말로 나 하나로 끝날 수 있는 건지.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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