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벌 보석실장의 첫사랑

1화

나는, 겨울 저녁의 정원에 서서, 손끝이 이미 감각을 잃어가는 것도 모른 채 승준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일찍 어두워졌고, 담장 너머로 아버지의 서재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내 등 뒤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 그림자가 승준의 낡은 코트 자락 위에 겹쳐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당의 마른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던 눈송이가 그의 어깨에 하나둘 쌓여가는 것을, 나는 왜 그렇게 오래 눈에 담았던가.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소영아." 그가 부르는 소리에도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잠겨 있는 것이 오히려 나를 더 잔인하게 만들었다. 늘 다정했던 그 음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 나는 그렇게 말했다, 준비해온 문장을 토해내듯.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갑게,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입안이 바싹 말라서 그 말을 뱉고 나서도 한동안 혀가 굳어 있었다. 승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이 오히려 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것 같아서, 나는 그가 무언가 묻기 전에 먼저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 나는 걸음을 옮기는 내내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 집안이 그의 가족에게 어떤 협박을 넣었는지, 그런 것들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리석었다, 그 순간에도 그가 상처받지 않을 거짓말을 고르고 있었던 내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를 지키는 길이라 믿었던 그 오만함이,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유치했던가. [너, 이러는 거…… 나 때문이야?]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나는 대답 대신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문의 쇠 손잡이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그 차가움이 마치 그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온몸으로 퍼졌고, 나는 그 감각을 오래도록 기억 속에 묻어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강승준이라는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른 밤이었다. *** 서울 강남의 로제타 주얼리 본사 12층, 내 이름이 적힌 명패 앞에서 나는 그날의 겨울과는 완전히 다른 계절을 살고 있었다. 창밖으로 늦가을 오후의 햇살이 사무실 바닥까지 비스듬히 스며들었고, 나는 방금 완성한 목걸이 세팅 도면을 손끝으로 짚으며 마지막 스톤의 배치를 다시 살피고 있었다. 도면 위로 떨어지는 빛의 결이 유난히 부드러워서,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 빛이 종이 위에서 퍼지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이런 순간마다 나는 열여섯 살의 겨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믿었다. "실장님, 이번 시즌 컬렉션 시안 최종 컨펌 부탁드립니다." 후배 디자이너 하나가 서류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고, 나는 도면 위에 흩어진 빛의 각도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스톤 세팅 각도, 이 부분만 삼 도 정도 낮춰봐요. 빛이 튀는 지점이 너무 위쪽에 몰려 있어서." 후배는 메모를 하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스물몇 살의 나를 잠깐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렸다. 지난 이십 년간 내가 쌓아온 것은 단순한 경력이 아니었다. 문소영이라는 이름이 붙은 디자인은 로제타 주얼리 안에서 하나의 브랜드였고, 나는 그것을 위해 내 과거의 흔적들을 하나씩 지워왔다. 대학 시절의 습작들, 첫 취업 면접에서 떨리던 목소리, 그리고 강씨 집안의 아들이었던 강승준, 이라는 이름 역시 그 흔적들 중 하나로, 나는 그 이름을 스스로의 기억 속 가장 깊은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 채 살아왔다. 가끔 도면 위로 겨울빛이 스칠 때면 그 서랍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다른 일에 손을 뻗었다. "문 실장, 오늘 저녁 시간 좀 있나." 회의실을 나서던 대표이사가 지나가며 물었고, 나는 담담하게 "네, 가능합니다"라고 답했다. 대표이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이런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가 이 회사에서 얼마나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는지를 재확인했고, 그 확인은 언제나 안도감과 함께 묘한 씁쓸함을 남겼다. 견고함이란 결국 무엇으로 쌓아 올린 것인가, 라는 질문을 나는 애써 삼켰다. 오후 늦게,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문재현, 나보다 세 살 많은 형은 내가 감춰온 것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의 전화는 언제나 반가움보다 먼저 긴장을 불러왔다. 휴대전화 액정에 뜬 형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도면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이번 주말에 청강그룹 자선경매 있는 거 알지. 초청장 갔을 텐데." 형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무심했지만,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사무실의 온도는 그대로였는데, 어째서 손끝만 겨울로 되돌아간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청강? 거기서 우리 쪽에 초청장을 왜 보내." 나는 애써 태연하게 물었지만, 이미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비서가 결재판 위에 올려둔 그 봉투를, 나는 그때까지 열어보지 않은 채 방치해두고 있었다. "몰랐어? 로제타 이번 시즌 후원사가 청강그룹이잖아. 그리고……" 형이 잠시 말을 멈추었고, 그 침묵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화기 너머로 형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짧은 정적 동안 봉투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그쪽 막내가 이번에 경영 전면에 나섰다더라. 이름이 강진하였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그대로 떨어뜨렸다. 종이가 책상 위로 떨어지며 나는 마른 소리가 사무실의 정적을 갈랐고, 그 소리가 마치 이십 년 전 대문의 쇠 손잡이가 내던 소리처럼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강진하. 승준의 막내 동생, 고등학생 시절 형을 따라다니며 나를 형처럼 부르던 그 소년의 이름이, 이십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형, 저 진하예요. 오늘도 승준이 형 만나러 왔어요?] 담장 아래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던 그 얼굴이,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인지. 나는 봉투를 다시 주워 들면서도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형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무언가를 더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 말들을 제대로 듣고 있지 못했다. "소영아, 듣고 있어?" 형이 조심스럽게 다시 불렀고,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듣고 있어" 하고 짧게 답했다. 그러나 내 목소리가 이미 평소와 다르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형도 눈치챘을 것이다. 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가지 않아도 돼. 후원사라고 꼭 참석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고 덧붙였지만, 나는 이미 그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제타의 실장으로서 나는 그 자리에 가야만 했고, 가지 않는다는 선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봉투를 열어보지 못한 채 책상 위에 그대로 두었다. 창밖의 늦가을 햇살은 여전히 부드럽게 사무실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는데, 그 빛 아래서 나는 문득 이십 년 전 그 겨울 저녁의 한기가 손끝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강진하라는 이름 하나가,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잠가두었던 서랍의 자물쇠를 순식간에 부숴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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