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벌 보석실장의 첫사랑

5화

그 주 내내 나는 진하의 방문을 대비해 사무실 문을 굳게 닫아두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그랬다. 혹시라도 그가 노크 없이 들어올까 봐, 혹은 복도에서 마주칠까 봐, 나는 결재판을 든 채로도 문틈 너머의 발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방어였다. 그날 밤의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이었고, 문을 닫아둔다고 해서 그 밤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예상보다 훨씬 태연하게 업무적인 태도로 돌아왔고, 그것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어색해했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눈을 피하거나 말을 더듬었으면, 나도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안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의 자료를 넘기며 시안에 대해 의견을 내는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이 라인의 메인 스톤은 좀 더 큰 걸로 가는 게 어때요." 회의실에서 그는 완전히 사무적인 어조로 시안을 넘겨보며 말했고, 그날 밤의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종이를 넘기는 손끝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강 상무님 취향이 아니라 시장성을 고려해서 정해야 합니다." 나는 똑같이 사무적으로 대응했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그 밤의 감각이 스멀스멀 되살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손끝에 남아 있던 온도, 어둠 속에서 들렸던 숨소리, 그 모든 것이 회의실의 형광등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시장성이라, 문 실장님은 늘 그렇게 이성적이시죠." 그가 슬쩍 웃으며 말했고, 그 웃음에는 지난밤의 여운이 은근하게 섞여 있어서 나는 애써 시선을 도면으로 돌렸다. 볼펜을 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이성적이라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어떤 것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았다. 회의는 예정된 시간보다 십 분쯤 더 길어졌고, 그 십 분 동안 나는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되풀이해 말해야 했다. 그가 일부러 질문을 늘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시안에 대한 의문이 그렇게 많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가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대답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표면적으로는 업무 관계였지만, 회의가 끝난 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그는 꼭 한 발짝 가까이 서곤 했고, 나는 그 거리감에 익숙해지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이미 조금씩 그 온도에 무뎌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그 짧은 순간이,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 중 가장 긴장되면서도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 되어 있었다. 한심했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애써 부정했다. "내일 미팅은 몇 시죠." 그가 물었고,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일정을 굳이 확인하려는 그 질문의 의도를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대답했다. "오전 열 시입니다." 대답을 마친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는 먼저 내리며 슬쩍 뒤돌아보았다. 그 눈빛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했지만, 나는 끝내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주 금요일, 예정에 없던 방문객이 로제타 본사 로비에 나타났다. "문소영 실장님 찾아왔는데요." 안내데스크에서 걸려온 전화에, 나는 별생각 없이 로비로 내려갔다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랜만이네요, 문 실장님." 진희였다. 승준과 진하의 누나, 강진희. 그녀는 세련된 슈트 차림으로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고, 그 눈빛에는 처음부터 적대감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녀만 유독 정지된 것처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진희 대표님."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했지만, 그녀는 인사를 받는 대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 동생이 왜 당신을 그렇게 붙잡고 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가서요." 그녀가 낮게 말했고, 그 어조에는 명령형에 가까운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그 말은 로비의 소음을 뚫고 정확하게 내 귀에 박혔다. "업무적인 파트너 관계일 뿐입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업무적인 관계인데, 굳이 지분까지 동원해서 사람을 지정할 필요가 있나요."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고, 나는 그 질문에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지분 문제는 이미 몇 번이나 곱씹었던 부분이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경고하러 왔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진하가 지금 무슨 판을 벌이고 있는지 당신이 알든 모르든, 우리 집안 일에 당신 같은 사람이 끼어드는 거, 나는 용납 못 해요." 그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 무표정함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저는 끼어들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손끝이 이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로비의 온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을 텐데, 유독 그 자리만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럴 생각이 없다면서, 이십 년 전에는 왜 우리 승준이 오빠를 그렇게 망가뜨렸어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고, 그 말에 나는 가슴이 버석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그리고 그것은 이 자리에서 처음 드러난,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가, 그 짧은 문장 하나에 통째로 얹혀 있었다. "그건……"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반박이 될 수 없다는 걸, 그 순간 알았다. "오빠가 이혼하고 그렇게 자취를 감췄던 것도, 결국 당신 때문이었다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어설프게 모른 척하지 마요." 그녀가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몸을 돌렸고, 그 뒷모습이 로비 회전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회전문이 몇 바퀴를 돌고서야, 나는 겨우 다리에 힘이 풀렸다는 걸 깨달았다. 한동안 로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지나가는 직원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나는 그저 진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십 년 전의 일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보다, 그 일이 지금 이 시점에 다시 튀어나온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어리석었다. 그 시간이 완전히 묻혔다고 믿었던 내가.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재해야 할 서류들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미끄러졌다. 창밖으로 늦가을 햇살이 스산하게 비쳐 들었고, 그 빛조차 오늘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오후,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고, 그 너머에서 들려온 낮고 익숙한 목소리에 온몸의 피가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소영아." 그 목소리가 이십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놓칠 것만 같았다. 강승준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는데도,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십 년 전의 어느 겨울날이 통째로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손끝이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나는 그 이름을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무너지듯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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