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은인이 방송 속 걔였다니

1화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나는, 반에서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심이라는 말은 사실 어울리지 않았다. 결심이라기보다는, 이미 벌어진 균열을 그냥 놔두기로 한 것에 가까웠으니까. 작년 이맘때쯤엔 그래도 인사를 건네는 애 하나쯤은 있었는데, 지금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도 아무도 내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것이 내가 아침마다 반복하는 유일한 의식이었다. 이어폰 줄을 정리하는 손끝이 습관처럼 떨렸는데, 그건 긴장이라기보다는 그냥 손이 기억하는 동작 같은 것이었다. 교실 안의 공기는 언제나 나를 투명한 유리처럼 통과했다. 누군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팔을 부딪쳐도 사과하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침묵이 몇 달 동안 쌓이면 그것도 하나의 규칙이 되어버린다는 걸, 나는 지난겨울 내내 배웠다. 작년 가을, 나는 등하굣길에 늘 지나던 청계 저수지 옆길에서 물에 빠진 중년 남자를 봤다. 처음엔 그냥 낚시하다 넘어진 건가 싶었는데, 물속에서 팔다리가 축 늘어진 채 떠오르지 않는 걸 보고 나는 가방을 던지고 그대로 뛰어들었다. 물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그 남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정신 차리세요, 정신 차리세요.] 나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그를 물 밖으로 끌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팔에 힘이 완전히 빠진 채로 남자를 뭍에 눕혔을 때, 그의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던 색깔만은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온몸이 흙탕물로 뒤덮인 채로 학교에 늦게 도착했을 때, 담임은 내 사정을 듣기도 전에 화를 냈다는 것만 또렷하게 남아 있다. 교복 셔츠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서도, 담임의 눈에는 그저 지각한 학생 하나가 서 있을 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날은 마침 체육대회 준비로 반 대표 넷이 팀을 짜야 하는 날이었는데, 내가 늦어서 우리 조는 인원 미달로 실격당했다. 나는 왜 늦었는지 설명하려 했지만, [됐어, 변명하지 마.] 그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가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나서 무언가가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내 책상 서랍에는 낙서가 늘어났고, 체육 시간에 팀을 짜면 늘 나만 남았고, 급식실에서 자리에 앉으면 옆자리가 슬며시 비었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부터는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세 번째쯤엔 이미 아무런 감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모든 걸 그저 견뎠다. 억울하다고 소리치기엔 이미 너무 늦었고, 해명한다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았으니까. 한심했다, 그때도 지금도, 그 남자를 구한 걸 후회하진 않으면서도 그날의 내 처신을 자꾸 되짚어보는 내가. 가끔은 그날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남자를 못 본 척 지나쳤다면. 가방을 던지지 않고 누군가를 불러오는 쪽을 택했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 교실 안에서 나는 조금 더 평범한 얼굴로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상상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끝났다. 어리석었다, 이런 걸 상상하는 것 자체가. 결국 나는 반 아이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내는 쪽을 택했다. 먼저 다가가지 않고, 다가오면 짧게 대답하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식으로. 그게 상처를 덜 받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나는 그 겨울 내내 배웠다. 그렇게 마음을 접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은 필요하면 무엇에든 익숙해지는 법이니까. 종례가 끝나고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향한 웃음일 리 없다는 걸, 아니 어쩌면 향한 웃음이라 해도 상관없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주입해 왔으니까.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유난히 희멀겋고, 그 빛 속을 걸어가는 내 그림자만이 유일하게 나를 따라오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신발장 앞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는 동안에도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건 이제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아무 감정도 일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문득 서글프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감정이 무뎌졌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그 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생생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신도현이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렸다. 그 남자가 나중에 학교에 은인을 찾는다며 몇 번이나 문의를 넣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나서지 않았다. 나설 이유가 없었다. 그 일로 얻은 건 익사할 뻔한 사람 하나의 목숨과, 내 자리 하나의 완전한 상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서야 왜 그 생각이 자꾸 나는 걸까. 그날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버스 정류장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후드를 눌러쓴 낯빛이 창백했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저 얼굴을 아는 사람이 이 동네에 몇 명이나 될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버스가 도착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나는 노트북을 켰다. 책상 위에 어질러진 노트와 필기구들을 대충 한쪽으로 밀어놓고, 의자를 당겨 앉는 그 짧은 동작조차 이제는 손에 익어 있었다. 화면에는 익숙한 로고가 떠올랐다. [숨은게 TV]. 얼굴을 가리는 검은 마스크와 후드, 그리고 왜곡된 음성. 그게 내가 유일하게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학교에서의 나와 방송 속의 나는,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마이크를 켜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순간, 학교에서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고, 그래서 오히려 내가 누구인지 온전히 말할 수 있었다. 방송을 시작하기 전, 나는 화면 속 채팅창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익숙한 이름들이 하나둘 접속 알림을 띄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매번 방송 초반에 들어오는 몇몇 아이디들, 그리고 늘 같은 자리에서 짧은 인사만 남기고 사라지는 이름들. 그중에 낯설지 않은, 최근 들어 유난히 자주 눈에 밟히는 아이디 하나가 눈에 걸렸다. [화님]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나는 그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이크 볼륨을 조정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런데도 손끝이 괜히 화면 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왜 하필 저 이름을 볼 때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건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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