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도윤은 어느 순간부터 하은의 문자 한 통이 오면 손끝이 먼저 반응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교길 버스 안에서든, 학교 앞 편의점에서든, 액정에 뜨는 짧은 문장 하나에 발걸음의 방향이 저절로 바뀌었고, 그날 이후 거의 매일 저녁 12층으로 올라가는 일이 습관처럼 반복되었다.
처음엔 별다른 의미 없이 시작된 걸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 옷매를 한 번 더 살피게 되었고, 초인종을 누르기 직전에는 습관처럼 숨을 고르는 버릇까지 생겨버렸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도윤 자신도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강도윤, 오늘도 왔네." 문을 열어주는 하은의 표정에는 늘 놀람보다 반가움이 먼저 스쳤고,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도윤은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몸 안쪽 어딘가에 뭉쳐 있던 것이 그 웃음 한 번에 풀어지는 것 같았다.
지현은 야근이 잦아 집에 없는 날이 많았지만, 그 빈자리를 하은의 웃음소리와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늘 밥솥에서 새어 나오는 밥 냄새와 하은이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뒤섞여, 도윤은 그 집 안의 온도가 자기 집보다 몇 도쯤 더 높은 것 같다고 종종 생각했다.
"오늘 학원 숙제 좀 도와줘, 나 수학 진짜 못한단 말이야." 하은이 책상 앞에 도윤을 앉히며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자, 어깨와 어깨가 맞닿을 듯한 거리감에 도윤은 애써 문제집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방 안의 좁은 형광등 불빛 아래, 하은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낯익은 로션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도윤은 그 냄새를 애써 무시하려 문제집의 숫자들을 노려보듯 뜯어보았다.
"이 문제, 어디서부터 막힌 건데." 도윤이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묻자, 하은은 볼펜 끝으로 문제를 콕콕 찌르며 "여기부터, 여기서부터 뭘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하고 대답했다. 좁은 책상 위, 종이 위에 놓인 두 사람의 손이 몇 번이나 스칠 뻔했는데, 그때마다 하은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지만 도윤의 심장은 그럴 수 없었다.
'그냥, 손이 스친 거야. 그게 다야.' 도윤은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었지만, 손등에 남은 온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거 이렇게 푸는 거 맞아?" 하은이 답을 확인하려고 몸을 기울이며 도윤의 팔에 자기 팔을 슬쩍 겹치자, 도윤은 순간 숨을 멈춘 채 종이 위 숫자가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볼펜 끝이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고, 다행히 하은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자기 답이 맞았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맞았지! 맞았지, 그렇지?" 하은이 도윤의 팔을 가볍게 흔들며 확인을 구하듯 물었고, 도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그냥, 친구 사이에 하는 행동인 건가.' 스스로 되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저녁, 같은 방.
숙제를 끝낸 뒤 하은이 갑자기 소파에 널브러지듯 누우며 도윤을 향해 발을 뻗었다. "다리 좀 주물러줘, 학교에서 하루 종일 서 있었더니 뭉쳤어."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도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웃으며 넘겨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도윤이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굳어 있자, 하은은 그 표정이 재밌다는 듯 발끝을 도윤의 무릎 쪽으로 슬쩍 더 밀었다. "왜, 못 해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도윤은 결국 어색하게 손을 뻗어 발목 근처를 몇 번 두드리듯 만졌는데, 그 손끝에 닿는 온기가 생각보다 뚜렷해서 순간 손을 거둬들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장난이야, 장난." 하은이 도윤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다리를 다시 접었지만, 그 짧은 순간 도윤의 눈에 비친 하은의 종아리 곡선과 무심하게 흘러내린 티셔츠 자락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나만 이렇게 신경 쓰는 게, 이상한 건가.'
하은은 이미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리모컨을 뒤적이고 있었지만, 도윤은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의 잔상을 떨쳐내지 못한 채 손끝을 무의식적으로 접었다 펴고 있었다.
"근데 너 여자친구 있어?" 하은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물었고, 도윤은 그 질문에 당황해 잠시 말을 잃었다.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하은의 손가락이 채널을 넘기는 와중에도, 그 시선은 슬쩍 도윤 쪽을 살피고 있었다.
"없어." "왜? 너 은근 괜찮게 생겼는데." 하은이 도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자, 도윤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텔레비전 화면의 푸른 불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도윤은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귓불까지 열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게 생겼다는 게 무슨 뜻이야." 도윤이 애써 무심하게 되묻자, 하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흐렸다. "몰라, 그냥 그런 느낌." 그 모호한 대답이 오히려 도윤의 머릿속에 더 오래 남았고,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한마디가 자꾸만 떠올라 도윤은 몇 번이나 발걸음을 늦추었다.
***
토요일 밤 9시, 하은의 방.
영화를 보자며 하은이 노트북을 침대 위에 펼쳐 놓았을 때, 도윤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방문 앞에 선 채로 괜히 벽에 걸린 액자를 살펴보는 척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하은의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 옆에 앉아. 화면 잘 안 보이잖아." 하은이 침대 한쪽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하자, 도윤은 결국 조심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 침대 매트리스가 살짝 눌리며 두 사람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좁혀졌고, 도윤은 애써 팔을 몸 쪽으로 붙인 채 최대한 몸을 굳히려 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십 분쯤 지났을 때, 하은이 어느 순간 도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가벼운 무게감이었지만, 도윤의 온몸은 그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밀크티 향 샴푸 냄새가 코끝에 스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어깨를 통해 전해지는데, 도윤은 화면 속 내용이 무엇인지 더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아.' 도윤은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며 그 자세를 지켰는데,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하은에게 들릴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손끝이 저절로 무릎 위에서 움켜쥐어졌고, 어깨 위로 전해지는 하은의 체온이 마치 낙인처럼 남는 듯한 감각으로 번져갔다.
영화 속 배경음악이 잠시 잦아드는 사이,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남았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커튼 사이로 얇게 스며들어 방 안을 은은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도윤은 그 은은한 빛 속에서 하은의 머리카락 냄새를 다시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도윤은 자기도 모르게 하은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옆얼굴은 화면의 푸른 빛을 받아 유독 선명했고, 콧날을 따라 흐르는 빛의 곡선과 살짝 벌어진 입술의 윤곽이 도윤의 눈에 새겨지듯 박혀들었다. 그 순간 도윤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 근처에서 오래 머물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이러면 안 돼.' 머릿속 어딘가에서 그런 목소리가 울렸지만, 몸은 이미 그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처럼 조금씩 하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하은이 눈을 깜빡이며 도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예상치 못하게 정면으로 마주쳤고,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노트북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대사 소리마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고, 도윤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 순간, 하은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살짝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