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저기, 도윤아." 하은이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도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는데, 그 짧은 침묵이 도윤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방금까지 어깨에 기대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은 겨우 손 하나 거리에 있었고, 도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하은의 옆얼굴에 부딪혀 부드러운 윤곽을 그리고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영화 속 대사도, 배경음악도 도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왜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거야.'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동시에, 도윤은 자신의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끝이 무릎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을 숨기려 도윤은 손가락을 슬쩍 오므려 쥐었다.
"어, 어." 도윤이 겨우 대답을 뱉어내는 순간, 하은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며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 뭐 묻었어! 계속 신경 쓰였는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손끝으로 도윤의 눈가를 가볍게 스치듯 닦아내자, 그 순간 도윤은 자기 몸이 딱딱하게 굳는 걸 넘어 거의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하은의 손끝은 따뜻했고, 그 온도가 눈가에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도윤의 피부 위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듯했다.
'별거 아닌 거였구나.' 안도감과 동시에, 어딘가 실망스러운 감정이 함께 밀려오는 걸 도윤은 애써 삼켰다. 화면 속 영화는 어느새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도윤의 머릿속에는 그 짧은 순간의 잔상만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하은이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대고 팝콘을 한 움큼 집어 먹는 모습을 옆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도윤은 좀 전 그녀의 손끝이 스쳤던 자리를 자꾸만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도, 도윤은 그 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밌었지?" 하은이 리모컨을 찾으며 무심하게 물었을 때, 도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학교 복도.
"강도윤, 요즘 유하은이랑 되게 붙어 다니더라?" 같은 반 남자아이 하나가 사물함 앞에서 도윤을 붙잡고 슬쩍 웃으며 물었다. 사물함 문을 닫으려던 도윤의 손이 잠시 멈췄고, 그 짧은 정지가 스스로도 어색하게 느껴져 도윤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사물함 문을 마저 닫았다.
"그냥 같은 아파트 살아서." 도윤이 애써 무심하게 답했지만, 그 말투에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지는 걸 느끼며, 도윤은 괜히 가방 끈을 고쳐 메는 척 시선을 피했다.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다른 아이가 옆에서 끼어들며 장난스럽게 묻자, 도윤은 순간 얼굴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귓불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고, 그 열기가 얼굴 전체로 퍼지기 전에 도윤은 서둘러 표정을 다잡았다.
"친구야, 그냥." 그렇게 답하면서도, 그 단어가 이제는 예전처럼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걸 도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친구.' 입 밖으로 내뱉은 그 단어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고, 그 이물감이 목구멍 안쪽에 오래도록 걸려 있는 듯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하은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인사했는데, 그 옆에 도윤이 모르는 남자아이 하나가 서서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크고 세련된 옷차림의 그 남학생은, 하은의 팔을 가볍게 치며 뭔가 농담을 건네는 듯했고, 하은은 그 농담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교실 안을 울릴 만큼 컸고, 그 소리가 유난히 도윤의 귓가에 오래 남았다.
도윤은 자기 자리에 앉으며 그 장면을 못 본 척했지만,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고, 그 힘의 근원을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애써 외면한 채, 도윤은 책을 펼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글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 조금 전 하은의 웃음소리와 낯선 남학생의 여유로운 몸짓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옆자리 짝꿍이 뭔가 말을 걸었지만, 도윤은 그 말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이 칠판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을 때에도, 도윤의 시선은 자꾸만 대각선 앞자리, 하은과 그 낯선 남학생이 나란히 앉아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짝지어 앉게 된 게 언제부터인지, 도윤은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뭔가 뒤늦은 것 같은 기분이 도윤의 속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
같은 날 오후 4시, 하교 후 아파트 로비.
"도윤아!" 하은이 뒤에서 도윤을 부르며 뛰어와 나란히 걸었는데, 오늘따라 그녀의 걸음이 유난히 가볍고 들떠 보였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뛰어오느라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 옆에서 가볍게 흔들렸고, 그 모습이 평소와 다름없이 반가우면서도, 도윤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봤어? 그 애, 전학생인데 되게 재밌더라." 하은이 아까 그 남학생 이야기를 꺼내며 눈을 반짝이자, 도윤의 걸음이 순간 미묘하게 느려졌다. 로비 유리문을 통과하는 오후의 햇살이 두 사람의 발밑에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의 길이만큼 도윤의 마음도 어딘가 길게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재밌었어?" 도윤이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안에 담긴 미묘한 날카로움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하은은 그런 뉘앙스를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응, 서울에서 왔대. 되게 유쾌해서 우리 반 애들이 다 좋아하더라고. 오늘 짝도 나랑 같이 앉게 됐어."
'그래서 그렇게 옆에 붙어 있었구나.' 도윤은 그 사실을 확인받았음에도 별로 개운하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오히려 그 정보가 가슴 어딘가를 더 깊게 눌러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하은은 휴대폰을 꺼내 뭔가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화면을 도윤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봐, 걔가 방금 나한테 메시지 보냈어. 내일 같이 밥 먹자고." 화면에는 낯선 이름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는데, 도윤은 그 화면을 잠시 바라본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 글자 몇 개가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박혔고, 그 잔상이 시야를 돌린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려고?" 도윤이 짧게 묻자, 하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몰라, 생각해 봐야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무게가 실려 있지 않았지만, 도윤에게는 그 가벼움조차 이상하게 무겁게 다가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함께 올라타는 동안, 도윤은 층수 표시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상한 답답함을 삼켰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평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고, 벽면에 비친 두 사람의 흐릿한 실루엣을 도윤은 애써 외면했다.
"근데 왜 갑자기 조용해졌어?" 하은이 도윤의 옆얼굴을 살피며 물었지만, 도윤은 애써 웃으며 "아니야, 그냥"이라고 답했다. 그 웃음이 어색하게 굳어 있다는 걸 도윤 자신도 느꼈지만, 달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8층에서 문이 열리고 도윤이 내리려는 순간, 하은이 문틈으로 손을 뻗어 도윤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그 손의 온도가 팔뚝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고, 도윤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일 저녁에 시간 돼? 걔랑 밥 먹는 거, 너도 같이 갈래?" 하은이 던진 그 제안에, 도윤은 순간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뒤엉키고 있었고, 그중 어느 것도 명확한 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하은의 얼굴에 스친 것이 순수한 호의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가늠할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은 그대로 닫혀버리고 말았다. 닫힌 문의 은빛 표면에 비친 자신의 흐릿한 얼굴을 바라보며, 도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