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 부회장의 충전모드

4화

다음 날 방과 후, 나는 약속대로 별관 3층으로 향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겨 나오면서도, 나는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본관에서 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늘 인적이 드물었다. 낡은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의 빛이 먼지 알갱이를 하나하나 비추었고, 나는 그 빛줄기를 가로지르며 걸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가벼웠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3층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오래된 나무 냄새, 그리고 그 위에 얹힌 옅은 섬유유연제 향. 서윤은 이미 창가에 앉아 있었다. 교복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고, 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채로. 평소 교실에서 보던, 흐트러짐 하나 없는 부회장의 자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무방비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왔네." "불렀잖아." 내 대답에 서윤이 옆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조금 어색하게 그 옆에 앉았다. 의자와 의자 사이의 거리가 어제보다 조금 좁아진 것 같았는데, 그게 서윤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고, 먼지 낀 공기 속에서도 이상하게 따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축구부의 호루라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제 고마웠어. 진심으로." "이미 들었잖아." "한 번 더 말하고 싶어서." 서윤이 살짝 웃었다. 억지스럽지 않은, 진짜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을 보며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정말입니까, 라고 되묻고 싶을 만큼 낯선 표정이었다. 학교에서는 저런 웃음을 지은 적이 없었으니까. "근데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너, 원래 이런 애야?"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애가 뭔데." "학교에서 보는 거랑, 여기서 보는 거랑 완전 다르잖아." 내가 말을 마치자 서윤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경직은 오래가지 않았고, 곧 다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학교에서의 나는… 만들어진 거야." "만들어졌다고?" 되묻는 내 목소리가 조금 커졌던 것 같다. 서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 선생님들이 기대하는 모습, 애들이 부러워하는 모습. 그런 것들을 다 조합해서 만든 게 지금의 나야." 서윤의 목소리가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뒤에 오래된 피로가 느껴졌다. 나는 순간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럼 진짜 너는?" "글쎄. 잘 모르겠어." 서윤이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자세가 평소의 당당한 부회장과는 너무 달라서, 나는 순간 이 애가 그저 열일곱 살 여자애일 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난 무릎, 그 위에 올려진 가느다란 손가락. 학생회 회의에서 마이크를 잡고 또박또박 발언하던 손과 지금 눈앞의 손이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어. 성적표 받으면 1등이 당연했고,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집안 분위기가 얼음장이 됐거든.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서윤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처음으로 이 애의 진짜 무게를 느꼈다.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았고, 선생님들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웃었고,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으로 걸었다. 그 세 겹의 껍질을 매일 아침 갈아입듯 걸치고 등교했을 서윤을 상상하니,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그래서 그렇게 숨어서 쉬는 거야?" "응. 여기가 유일하게,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어." 서윤이 창틀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오후 빛이 그 옆얼굴에 얇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그 그림자의 경계선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문득 이 순간이 너무 사적인 것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 시선을 잠깐 창밖으로 돌렸다. "근데 이제 나도 알잖아." 서윤이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순간 불안이 스쳤다. 방금까지의 편안함이 순식간에 걷히고, 그 아래 숨어 있던 조심스러움이 드러났다. "그게 문제야. 근데…" "근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계속 들키고 싶었나 봐." 그 말이 묘하게 들렸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서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오후 햇살이 서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도 없는데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들키고 싶었다니. 그게 다일까? "들키고 싶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몰라. 나도 나를 모르겠어." 서윤이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 이상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겨우 내려놓은 사람의 웃음처럼.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별다른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새 한 마리가 지나가는 소리, 먼 데서 들리는 축구부 훈련 소리, 그런 사소한 배경음들이 정적을 채웠다. 나는 그 정적이 이상하게 편했다. 억지로 말을 채우지 않아도 되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라는 게 낯설면서도 좋았다. 서윤의 어깨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느껴졌고, 나는 괜히 손끝으로 교복 치맛단을 만지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매일 이 시간에 여기 있어도 돼?" "허락받는 거야?" "응." 서윤이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선이 생각보다 오래 머물러서, 나는 괜히 창밖으로 눈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다. "매일은 아니고, 가끔." "가끔이면 얼마나 자주?" "글쎄. 그때그때 다르지 않을까."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 애매함 속에서 뭔가 확실한 걸 느꼈다. 이 관계가 계약서 한 장으로 시작된 강제적인 것이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다른 무게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걸. 계약. 그 단어를 떠올리자 잠깐 마음이 복잡해졌다. 처음엔 서로에게 필요에 의해 묶인 관계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서윤의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와 흔들리는 눈빛과 짧은 웃음을 보고 있으니, 그 계약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느껴졌다. 타협점.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건 타협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나와 서윤은 정말로 자주 그 별관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며칠에 한 번씩이었던 것이, 어느새 거의 매일로 바뀌어 있었다. 종례가 끝나면 나는 습관처럼 별관 계단을 올랐고, 서윤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에 걸쳐진 재킷, 걷어 올린 셔츠 소매, 그리고 조금씩 더 편안해지는 웃음. 교실에서 마주칠 때면 서윤은 여전히 완벽한 부회장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박또박한 발언, 흐트러짐 없는 자세, 누구에게도 틈을 보이지 않는 표정.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나만의 것이라는 게, 이상하게 벅찼다. 그런데 그날, 나는 미처 몰랐다. 그 은밀한 시간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별관 3층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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