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연무장 뒷마당에 널브러진 채로, 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죽기 직전에 보는 하늘은 원래 이렇게 쓸데없이 맑은 법인가.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릿한 피 냄새가 그 위에 겹쳐졌다.
등짝에 박힌 자갈 하나가 지독하게 신경을 긁었는데, 하필 그게 아픈 갈비뼈 바로 아래였다.
전생에 나는 천계 수라대제라 불렸다.
무한한 경지에 올라 그 위로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늘이 나를 벌했다.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다만 벼락 같은 게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쪼개고 지나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태화국 17황자 이신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이 몸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걸레짝이었다.
무맥이 없었다.
무공을 배울 수 있는 체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태생부터 정해진 폐인.
전생의 기억과 안목은 고스란히 남았는데, 그걸 담을 그릇이 텅 비어 있었다.
검을 쥐어도 기운 한 톨 움직이지 않았고, 명상을 해도 단전은 그냥 살덩어리였다.
처음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사흘 동안 방에 처박혀 있었다.
수만 년을 갈고닦은 안목으로, 내 몸이 얼마나 형편없는 그릇인지를 매초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지독한 형벌인지 아는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걸 두고 사기라고 하는 거다.
그리고 지금, 그 폐인 몸뚱이가 흙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이신, 네놈이 감히 7군주님을 능욕하려 했다는 게 사실이냐.”
이강이었다.
3황자, 7조 무맥을 개봉한 무천당 소속 무사.
그가 발끝으로 내 옆구리를 툭툭 건드리며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참으로 잘생겼다.
속으로 그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능욕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입안에서 피 맛이 났다.
철분과 소금이 섞인, 그 오묘하게 역겨운 맛.
“유하린 군주의 처소 담벼락에서 발견됐다지 않느냐. 이 물건까지.”
이강이 손에 든 옥패를 흔들었다.
내 것도 아니고, 본 적도 없는 옥패였다.
옥의 결이 너무 새것 같았고, 새겨진 글자체도 이 시대 것과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조작이라는 걸 눈치 못 챌 사람이 몇이나 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잡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솜씨가 형편없다고, 이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신기했다.
[누명입니다.]
낯익은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전생의 공법, 수라천제결의 파편이 남긴 잔영이었다.
평소엔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가 가끔 이렇게 한마디씩 던지곤 했다.
‘그걸 지금 알았냐.’
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겉으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강의 뒤로 무천당 무사 셋이 서 있었고, 그들의 눈에는 이미 확신이 서려 있었다.
확신이라기보다는, 재미없어진 놀이를 그만 끝내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저들에게 나는 이미 결론이 난 사건이었다.
증거니 진실이니 하는 건 애초에 필요 없는, 그냥 발로 몇 번 더 밟고 끌고 가면 끝나는 일.
콰앙!
발길질이 배에 박혔다.
숨이 턱 막혔고, 위장이 뒤집히는 느낌이 났다.
입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눈앞이 잠깐 하얗게 번쩍였다가, 다시 흙바닥의 갈색으로 돌아왔다.
“이래도 아니라고 우길 텐가, 폐인.”
한 무사가 침을 뱉었다.
바로 내 옆,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거리였다.
정확하다.
나였다면 저 위치에 뱉지 않았을 텐데, 저건 그냥 위협용이지 조준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낮고 청량한 목소리가 그 순간 들려왔다.
담장 위, 정확히는 담장 옆 회랑 기둥 아래.
유하린이었다.
7군주, 무천왕의 딸.
9등 천맥을 지닌, 이 나라에서 가장 재능 있는 무맥의 소유자.
이미 무사 경지에 올라선 열일곱 살 여인이었다.
하얀 궁장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 아래로 드러난 눈빛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걸음걸이조차 절제되어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맥의 흐름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또 얄미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3황자, 저 폐인이 정말 제 처소 근처에 갈 담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군주님, 그건···.”
이강의 목소리가 순간 기어들어갔다.
방금까지 나를 짓밟던 그 위세는 어디로 갔는지, 유하린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됐습니다. 그냥 손이 심심하셨던 걸로 알겠습니다.”
유하린이 나를 내려다봤다.
동정도, 분노도 없는 눈빛이었다.
그냥 길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딱 그 정도의 관심.
그 눈빛에는 최소한의 호기심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약혼녀라는 게 참 부끄러운 일이군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등을 돌렸다.
···그래.
부끄럽다는 말이지.
나는 흙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갈비뼈 어딘가가 부러진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관절 마디마디가 삐걱거렸고, 팔에 힘을 줄 때마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지독하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전생에 나는 수만 년을 살았다.
배신, 조롱, 하극상 같은 건 이미 셀 수도 없이 겪었다.
한 번은 내 손으로 키운 제자에게 등을 찔린 적도 있었고, 한 번은 믿었던 동료가 내 심장을 향해 검을 겨눈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는 언제나 판을 다시 짰다.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울어봤자 아무도 대신 갈비뼈를 붙여주지 않으니까.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건, 이번에는 내 몸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3황자.”
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건 분명한 확신이었다.
“무슨 할 말이 남았느냐, 폐인.”
이강이 비웃었다.
그 웃음에는 이미 이 상황이 완전히 끝났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선언하는 겁니다.”
“···뭐?”
나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피가 흐르는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나는 저 멀리 등을 보이고 있는 유하린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3개월.”
“···?”
“3개월 안에, 유하린 당신을 이 황궁에서 쫓아내겠습니다.”
연무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이강도, 무사들도, 심지어 멀어지던 유하린의 발걸음까지 멈췄다.
모두가 나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저 표정들, 아주 잘 안다.
전생에도 저런 눈빛을 수백 번은 받아봤다.
믿을 수 없는 놈, 혹은 곧 죽을 놈을 보는 눈빛.
실제로 나도 지금 이 몸이 뭘 할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무맥도 없고, 갈비뼈도 부러졌고, 내가 가진 건 전생의 기억뿐이었다.
계산해보면 승산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승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판을 뒤집는 데 필요한 건 힘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전생에서도 그랬다.
가장 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가장 마지막까지 눈을 깔지 않은 자가 판을 가져갔다.
유하린이 천천히 돌아봤다.
처음으로 그녀의 눈빛에 감정이 스쳤다.
경멸이 아니라, 미묘한 균열 같은 것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균열을 정확히 봤다.
수만 년 동안 사람 얼굴 읽는 법만 훈련한 눈이 그 정도는 놓치지 않는다.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녀가 웃었다.
비웃음이었지만, 이전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어딘가 시험해보고 싶다는 듯한, 그런 웃음.
“3개월 뒤에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17황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부러진 갈비뼈가 웃을 때마다 시큰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입가에 흐른 피가 이 사이로 스며들어 씁쓸한 맛을 냈다.
이강이 여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정신이 나갔구나. 오늘 일은 여기서 끝내주지. 다음엔 이렇게 곱게 안 끝난다.”
그가 무사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연무장에는 나 혼자 남았다.
바람이 한 번 불었다.
흙먼지가 발밑에서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무릎이 꺾였다.
나는 흙바닥에 다시 앉아버렸다.
하··· 아프다.
갈비뼈뿐만 아니라 온몸이 다 아팠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때마다 어딘가에서 신호가 왔다.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심지어 아프지 않은 데를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방금 그 선언, 후회하실 겁니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알아. 그런데 이미 뱉었으니 주워담을 수도 없잖아.’
[구체적인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없어.’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일단 이 갈비뼈부터 붙이고 생각하자.’
목소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 저것도 이 사기 같은 상황에 나름대로 어이없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하늘을 다시 올려다봤다.
여전히 맑았다.
다만 이번에는, 그 맑음이 그렇게 재수 없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이 판을 뒤집는 첫걸음을 축하해주는 것처럼도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인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차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근거 없는 자신감뿐이었으니까.
멀리서 발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까 떠났던 무사들의 발소리와는 달랐다.
훨씬 조심스럽고, 훨씬 느린.
나는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