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후작가 숨은 천재 마법사

2화

생존 전략은 지금까지의 행동과 정반대라는 것, 그 한 가지는 확실했지만, 정반대로 산다고 해서 저절로 마력이 생기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다음 날 아침부터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원작 속 파멸 플래그를 피하겠다고 마음만 먹은 채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그건 그냥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방구석에서 이불킥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원작 게임 속에서 이서한이라는 캐릭터는 마력 재능이 '숨겨진 재능'으로만 서술되어 있었는데, 그 말인즉슨 초반부에는 아무도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이었고,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내 몸속에 마력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주요 인물들, 이를테면 마탑의 천재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력 측정기에 바늘이 튀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서한 항목에는 그런 문장이 아예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매뉴얼도 없이 미지의 기계를 분해하고 있는 셈이었다. '일단 확인부터 해야 되는데.' 문제는 방법이었다. 전생의 나는 이 게임을 그저 유저로서 플레이했을 뿐이지, 실제로 마력을 다루는 법 같은 걸 알 리가 없었으니까, 결국 게임 속 튜토리얼 대사나 로딩 화면에 스쳐 지나가던 텍스트들을 기억 속에서 하나씩 끄집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회사 다닐 때 로딩 화면 넘기려고 스킵 버튼만 죽어라 눌러댔던 과거의 내가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다섯 살짜리 몸으로 방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심상 집중법'이라는 걸 흉내내 보았는데, 그건 게임 시작 화면에서 캐릭터 배경 설명으로 스쳐 지나가던 문구였다. 마법사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뭐 그런 뻔한 소리였는데, 뻔한 소리라도 지금은 유일한 지침서였으니까 무시할 수 없었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손등의 투명한 혈관을 내려다보며, 그 안에 뭔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정신을 집중했는데, 십 분쯤... 아니 체감상으로는 훨씬 길게 느껴진 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눈을 떴다. 손끝이 저릿한 것도 아니고, 배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리에 쥐가 나려는 감각뿐이었다. '...역시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이튿날에는 방법을 바꿔서, 숨을 참으며 심장 소리에 집중하는 방식도 시도해봤고, 그다음 날에는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뭔가 따뜻한 기운이 도는 느낌을 억지로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결과는 똑같았다. 아무 반응 없음. 시야에 뜨는 텍스트도 없음. 그냥 다섯 살짜리가 방바닥에 앉아 눈 감고 있는 그림뿐이었다. 그렇게 사흘을 허비했다. 소이가 아침저녁으로 방을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뭔가 이상한 놀이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도, 도련님... 괜찮으세요?" 하고 물어왔는데, 그 질문에 나는 그냥 웃으며 "응, 괜찮아" 하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살짜리가 명상을 한다고 설명해줘도 믿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한 번은 소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에 손을 짚어보기까지 했는데, "열은 없으신데..." 하고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열이 아니라 마력이 없어서 그래'라고 대답할 뻔했다. 나흘째 되던 날, 나는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명상이라는 게 너무 정적인 방법이라서 안 되는 게 아닐까 싶었고, 그렇다면 반대로 신체에 극한의 자극을 줬을 때 뭔가 반응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건 순전히 감이었다. 다만 그 감이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았는데, 원작 게임에서 각성 이벤트들은 대부분 위기 상황이나 격한 감정 상태에서 트리거되었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몬스터에게 쫓기다가, 혹은 소중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다가 갑자기 능력이 폭발하는 그런 흔한 클리셰였다. 문제는 다섯 살짜리 몸으로 몬스터에게 쫓길 상황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신 저택 뒤뜰의 우물가로 가서, 아직 겨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찬물을 손등에 부어보았다. 차가운 감각이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알림: 미약한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뭐?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눈앞에 이런 게 뜬다는 것도 놀라운데, 게임처럼 텍스트 창이 시야 한켠에 반투명하게 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이건 게임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라는 걸 다시 한번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손등이 시퍼렇게 얼어붙는 것 같은 그 짧은 순간에, 뭔가 아주 작은 것이 몸속에서 꿈틀거렸다는 느낌, 그 느낌을 나는 분명히 받았다. '...이게, 되네...?' 손을 다시 물속에 담갔다. 반응이 없었다. 다시 꺼내서 찬 공기에 노출시켰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의 그 반응은 온도 변화 자체가 아니라, 아마도 그 순간의 놀라움이나 자극의 급격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섰고, 나는 그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이번엔 손등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알림: 미약한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또 떴다. 혹시나 해서 이번엔 손바닥으로 우물돌을 세게 내리쳐보았다. 반응이 있었다. 이번엔 반대로, 그냥 손을 흔들어보거나 발을 굴러보거나 하는 자극 없는 움직임을 시도했는데, 이 경우엔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온도가 아니라 신체적 자극, 특히 통증에 가까운 자극에 반응하는 구조라는 결론이 나왔는데, 이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나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더럽게 안 좋은 조건이네.' 생각해보면 앞뒤가 맞았다. 원작에서 이서한이 학대를 당하면서도 마력 재능이 잠재되어 있었다는 서술, 그리고 그 재능이 결국 중반부 결전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났다는 설정, 이 모든 게 이 시스템 하나로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즉 이 몸의 마력은 고통과 자극을 자양분으로 자라나는 구조였고, 그 말은 곧 내가 마력을 단련하려면 스스로에게 고통을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방식으로 설계된 재능이라니, 신은 있다면 취향이 참 고약한 것 같았다. 미친...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이런 방식으로 마력을 키운다는 게 과연 지속 가능한 방법인지, 그리고 다섯 살짜리 어린애의 몸으로 자해에 가까운 행위를 반복하다가 오히려 몸이 망가지는 게 아닌지, 걱정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골절이나 화상 같은 큰 자극을 줬을 때 마력 반응이 더 크게 뜨는지도 궁금했지만, 그건 도박에 가까운 실험이었고, 다섯 살짜리 몸으로 도박을 할 정도로 배짱이 좋진 않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시간은 유한했고, 원작의 파멸 엔딩은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그래서 나는 타협안을 찾기로 했다. 지나치게 위험한 자해보다는, 몸을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방법, 이를테면 냉수욕이나 가벼운 체벌 수준의 통증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방식으로 마력을 조금씩 축적해나가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을 세우면서도 스스로가 좀 우스웠다. 회사원으로 살 때는 야근이 힘들다고 투덜대던 내가, 지금은 스스로 몸에 고통을 주는 훈련법을 짜고 있으니까. 헬스 트레이너들이 흔히 말하는 '노 페인, 노 게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문자 그대로 적용될 줄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박관수를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관수, 나 우물 좀 매일 아침에 쓸 수 있을까?" 박관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우물을... 왜요, 도련님?" "...몸 단련하려고." 다섯 살짜리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뜬금없었는지, 박관수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혹시 물놀이가 하고 싶으신 거라면 큰 대야를 방으로 가져다드릴 수도 있는데요"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꼭 우물이어야 해." 사실 우물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우물물이 대야에 받아둔 물보다 훨씬 자극적일 게 분명했으니까, 나는 고집을 부렸다. 결국 박관수는 "...알겠습니다" 하고 답했는데, 그 표정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감과 동시에, 최근 들어 달라진 도련님을 그냥 존중해주기로 한 듯한 묘한 인내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덧붙여 "감기라도 걸리시면 마님께 제가 혼이 납니다"라며 반은 걱정, 반은 자기 신세 한탄에 가까운 소리를 했는데, 나는 그 말에 "안 걸릴게" 하고 짧게 웃어넘겼다. 그렇게 나는 매일 아침 우물가에서 찬물을 손에 붓고, 가끔은 손등을 꼬집거나 손톱으로 눌러가며 미세한 통증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아침 일과를 시작했는데, 첫날에는 소이가 놀라서 뛰어와 "도, 도련님, 그러다 손 다치세요!" 하고 손을 잡아 뜯어놓았고, 나는 그때마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다독이면서도 속으로는 알림창이 뜨는지 아닌지에 더 신경이 쓰였다. 이게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 아니면 그냥 다섯 살짜리가 이상한 자해 습관을 들이는 것뿐인지, 그때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시스템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것은 반응했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응이 아주 미약할지언정,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무언가가 될 거라는 믿음, 그 근거 없는 믿음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다만 그 믿음이 얼마나 위태로운 줄타기인지, 매일 아침 손등에 물을 붓고 살갗을 꼬집으면서도, 나는 그 대가가 어디까지 갈지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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