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시험 접수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진홍 후작가의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서류상 절차는 거의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는데, 담당 관리는 서류를 훑어보다가 가문 문장을 확인하고는 별다른 질문 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게 귀족 사회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평민이었다면 신원 조회에, 추천서에, 최소한 며칠은 걸릴 절차가 문장 하나로 끝나버리는 거니까.
이강호는 아들의 조기입학 시험 소식을 듣고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서재에서 잠깐 마주쳤을 때 그저 "시험이라니, 대단하구나" 하는 한 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 무관심이 오히려 편했다. 괜히 관심을 받아서 시험 준비 과정을 지켜보게 되는 것보다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편이 계획을 숨기기에 훨씬 유리했으니까.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5년간 우물가에서 반복했던 그 훈련의 흔적을 어떻게든 발견했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계획이 시작 단계에서부터 어긋났을지도 모른다.
시험 당일 아침, 소이는 내 옷매를 정리해주며 유난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옷깃을 몇 번이나 다시 펴고, 이미 반듯한 소매를 또 매만지는 손길에서 그녀가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도련님, 떨리지 않으세요?"
"조금."
"조금이요? 저는 도련님보다 더 떨리는 것 같은데요."
소이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는데, 그 웃음 끝이 살짝 떨리고 있어서 나는 별수 없이 픽 웃고 말았다. 사실 조금이 아니었다. 5년간 쌓아온 게 실제로 시험대에서 검증될지, 아니면 그동안의 노력이 다 헛수고였는지, 그 판가름이 오늘 나게 될 테니까. 매일 아침 손끝이 부르틀 정도로 반복했던 그 감각 훈련이, 몇 시간 후면 숫자로든 판정으로든 결과가 나올 거였다.
왕국 마법학원의 시험장은 후작가의 마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었다.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머릿속으로 시험 순서를 다시 정리했는데, 이론 필기와 마력 발현 측정, 이 두 단계 중 어느 쪽에서 문제가 생길지 계속 가늠해보았다. 도착해서 마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광장 한가운데 모여 있는 수십 명의 응시생들이었다.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각자 화려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옷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평범한 후작가 소공자로서 조용히 자리를 찾아 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가문을 확인하듯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나에게도 몇 번 스쳤다가 지나갔다. 후작가의 문장을 알아본 몇몇이 살짝 고개를 숙이는 듯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지만, 나는 최대한 관심을 끌지 않으려고 짧게 목례만 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때 시선을 끄는 무리가 있었다. 금발에 벽안을 가진 소년이 응시생들 사이에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는데, 옷차림은 검소했지만 그 태도에는 위축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화려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그 소년의 태도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드는 모습이었다.
'저게... 유진혁인가.'
원작 게임에서 봤던 그 얼굴, 그 금발과 벽안의 조합을 눈앞에서 실제로 보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마법사의 추천으로 입학했다던 그 평민 소년이, 지금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른 응시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도트 그래픽과 대사창으로만 존재했던 인물이, 지금은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옆에는 흑장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서 있었는데, 이국적인 문양이 새겨진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걸 보니 남해국 출신이라는 게 한눈에 짐작됐다. 이름이 하련이었나, 원작에서 유진혁과 가까운 관계로 등장했던 서브 히로인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무리에서 약간 떨어져 서 있었는데, 그 시선만큼은 계속 유진혁 쪽을 향해 있었다.
좀 더 떨어진 곳에는 갈색 피부에 화려한 스타일을, 그것도 제복을 크롭해서 입은 소녀도 보였는데, 그쪽도 낯설지 않았다. 여진주였다. 유진혁을 향한 호의를 감추지 않던 캐릭터로, 원작에서도 유진혁이 지나갈 때마다 은근슬쩍 옆으로 붙어서 말을 걸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지금도 그 성격이 그대로인지 유진혁 주위를 맴돌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원작 인물들이 다 여기 모여 있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원작의 흐름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게임 속 텍스트로만 읽었던 인물 관계도가 지금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동시에 서늘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나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무리에서 살짝 떨어진 자리에 서서 조용히 시험 순서를 기다렸다.
시험은 두 단계로 나뉘었다. 1단계는 이론 필기였고, 2단계는 실전 마력 발현 측정이었는데, 1단계는 원작 게임 지식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마법 이론이라는 게 결국 게임 튜토리얼에서 지루하게 설명되던 내용들의 조합이었으니까. 마력 순환 구조, 원소 상관관계, 마법식의 기본 문법까지, 시험지에 나온 문제들은 하나같이 어디선가 이미 본 듯한 기억이었다. 감독관이 답안지를 걷어가면서 내 시험지를 슬쩍 훑어보고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것도 그럴 만한 반응이었을 거다.
문제는 2단계였다.
시험관들이 응시생들을 한 명씩 원형의 석판 위로 불러세웠는데, 그 석판은 마력 발현 정도를 측정하는 마도구였다. 앞선 응시생들이 하나둘 석판 위에 올라 마력을 방출할 때마다, 석판 가장자리에 새겨진 문양이 빛을 내며 숫자를 표시했는데, 대부분은 미미한 수준에서 그쳤고 몇몇 명문가 아이들만 조금 더 밝은 빛을 냈다. 이름을 부르는 순서가 후작가부터 시작되어서, 나는 예상보다 빠르게 호출되었다.
"진홍 후작가, 이서한."
석판 위로 올라서자,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마도구가 작동을 준비하는 소리인지 아니면 내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시험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방출하시면 됩니다. 준비되셨습니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5년간 매일 아침 우물가에서 반복했던 그 감각, 손끝에서 시작되는 미세한 진동을 떠올리며 그것을 온몸으로 끌어올렸는데, 처음에는 평소처럼 익숙한 수준의 감각이 올라왔다. 늘 그렇듯 손끝이 살짝 저릿해지고, 그 저릿함이 손바닥까지 퍼지는, 지겹도록 겪어온 그 패턴이었다.
그런데,
그 진동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손끝에서 멈춰야 할 그 감각이, 오늘은 손목을 지나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까지 퍼졌고, 그것도 멈추지 않고 가슴을 지나 온몸으로 확산되는 걸 느끼며, 나는 속으로 '이거 뭔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멈출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마치 오랫동안 눌러왔던 수도꼭지가 갑자기 통째로 뽑혀나간 것처럼, 그동안 조심스럽게 조절해왔던 감각이 한순간에 통제를 벗어났다.
[경고: 축적된 마력이 예상 범위를 초과했습니다.]
[알림: 마력이 발현됩니다.]
콰아아앙----!!
석판 전체가 하얀 빛으로 뒤덮였고, 그 빛이 시험장 전체를 밝히면서, 순간적으로 주변이 완전히 정지한 듯한 정적이 흘렀다. 웅성거리던 응시생들의 목소리도, 시험관들의 발소리도, 그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지워진 듯했다.
나는 그 빛 속에서 눈을 뜬 채로 서 있었는데, 시험관의 표정이 심드렁함에서 경악으로 바뀌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판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 소리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멀리서 유진혁으로 보이는 소년이 눈을 크게 뜬 채 이쪽을 보고 있었고, 하련이라는 이름의 소녀도 팔짱을 풀고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여진주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작 속 조연이었던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원작 주인공들의 시선을 전부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거, 개사긴데?'
5년간 조심스럽게 숨겨왔던 계획이, 지금 이 한순간의 빛 속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걸, 나는 그 하얀 빛에 눈이 부신 채로 직감하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남들보다 반걸음만 앞서서 준비를 해두겠다는 계산이, 이 순간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빛이 서서히 잦아들면서, 석판 위에 새겨진 숫자가 천천히 떠올랐는데, 그 숫자를 확인한 시험관의 입이 벌어진 채로 다물어지지 않는 걸 보면서, 나는 직감했다. 이제부터는 조용히 지나갈 수 있는 판이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