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옥상 철문이 바람에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걸려 있었고, 강민준은 그 틈으로 스며드는 저녁 공기를 맞으며 손에 쥔 만화책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표지 모서리는 이미 여러 번 접혔다가 펴진 자국으로 얇아져 있었는데, 그는 그 얇아진 부분을 손톱으로 긁는 버릇이 있었다. 방과 후의 옥상은 늘 비어 있어서 그가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은 곳이었고, 급식실 냄새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다가 옥상 문턱에서 흩어지는 것도, 멀리서 축구부가 지르는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오다가 잦아드는 것도 그에게는 익숙한 배경음이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구두가 아니라 실내화인데도 유난히 또렷하게 울리는 그 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발소리는 계단을 오르는 속도치고는 지나치게 일정했는데, 마치 걸음 하나하나를 미리 재고 딱딱 맞춰 걷는 것 같았다. 한서연이 그곳에 서 있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고, 정수리 쪽에서 삐죽 솟은 아호게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눈에 박혔다. 학교 최고 미녀라는 수식어가 늘 그녀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는 걸 강민준도 알고 있었지만, 그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상황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녀 주변으로 몰려드는 시선들, 남자애들이 그녀 이름만 나와도 목소리를 낮추던 것, 그런 풍경 속에서 강민준은 늘 배경에 불과했다.
"강민준." 그녀가 이름을 불렀다.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어딘가 사무적인 어조였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강민준은 만화책을 등 뒤로 슬쩍 숨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끝이 이유 없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면서도 그는 애써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응." 그녀가 두 걸음 더 다가왔다. 교복 셔츠의 소매가 바람에 부풀었다가 가라앉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가 다시 풀리는 걸 그는 놓치지 않았지만 그 의미를 읽어낼 재간은 없었다. 노을이 그녀의 뒤편에서 넘어오고 있어서, 그녀의 얼굴은 반쪽만 밝고 반쪽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나랑 사귀어줘."
세상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강민준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풀이해야 했는데, 되풀이할수록 오히려 현실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살아온 열일곱 해 동안 이런 문장이 자신을 향해 던져진 적은 없었고, 더군다나 던진 사람이 한서연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이었다. 언젠가 짝꿍이 지나가듯 던진 말이 떠올랐다. "너랑 한서연이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지 않냐." 그때는 웃어넘겼는데, 지금은 그 말이 이상하게 목구멍에 걸렸다.
"진짜야?" 그가 겨우 물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진짜야."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동자는 노을 때문인지 유난히 짙어 보였고,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강민준은 도무지 짚어낼 수 없었다. "오래전부터 지켜봤어. 너 성실하잖아. 그런 사람이 좋아."
그 말이 귀에 닿는 순간, 강민준의 가슴 어딘가에서 뭔가가 터지듯 부풀어 올랐다. 오타쿠라는 딱지, 인기 없는 쪽이라는 자각, 반에서 존재감 없이 흘러가던 하루하루가 한꺼번에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급식실에서 혼자 먹던 점심, 체육 시간마다 짝을 못 구해 우물쭈물하던 순간들, 그런 것들이 전부 별것 아닌 일처럼 가벼워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어색하고 서툰 웃음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나도... 사실 너 좋아했어." 그가 말했다. 말해놓고 나니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한서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 미소가 사진처럼 잘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느꼈지만, 강민준은 그 생각을 애써 지웠다. 지금 이 순간에 그런 의심을 품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되뇄다.
"그럼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손을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강민준은 그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서늘했다. 그 서늘함이 왜 이렇게 오래 남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마치 얼음을 쥔 것처럼, 손을 놓아도 한기가 손금 사이사이에 스며든 것처럼, 그는 그 감각을 오래도록 곱씹게 될 거라는 걸 그때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로 몇 초가 흘렀을까, 옥상 철문 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강민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틈으로 삐죽 나온 스마트폰 카메라의 렌즈가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 하고 빛나고 있었다.
"어?" 그가 손을 놓으며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문 뒤에서 낄낄대는 소리가 몇 겹으로 겹쳐 들렸고, 그중 하나는 분명히 박진혁의 목소리였다. 다른 목소리도 섞여 있었는데,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해서 그는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서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의 팔을 다시 잡아끌었다. "신경 쓰지 마."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강민준은 그 차분함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의 다정함과 지금의 무심함 사이에 어떤 이음새도 없어서,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문틈으로 보이던 렌즈가 사라졌다.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멀어져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소리는 여러 명이었고, 누군가 숨을 참다가 터뜨리듯 웃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렸다.
강민준은 그제야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지만, 손을 놓지 못한 채 그저 서 있었다. 옥상 바닥에 깔린 시멘트의 거친 감촉이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졌고, 노을은 조금 전보다 더 붉게 타올라 그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한서연의 손은 여전히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온도는 방금 전 잡았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문 뒤에서 사라진 렌즈가, 그리고 그 렌즈가 담아냈을 무언가가, 앞으로 자신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바꾸어놓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감도 하지 못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