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당한 세차왕의 역습

2화

궁전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확히는 아수라장이 될 만큼 소란스러워지진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가 아수라장 급으로 차갑게 식었다는 뜻이다. 높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샹들리에 불빛 아래, 대리석 바닥은 거울처럼 반들거렸고, 그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는 내 모습이 어색하게 비쳤다. 서른 넘게 살아온 삶 중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주목받은 적이 있었나. 결혼식장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성녀님을 소환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계단 위 남자, 이헌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나라의 제2왕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절제되어 있었으나, 그 절제 안에 경멸이 완벽하게 압축되어 있었다. 은빛 갑주를 걸친 그의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붉은 망토 자락이 계단을 타고 흐르는 게, 마치 이 궁전 전체가 그를 위해 세워진 것 같은 위압감을 뿜어냈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게 함께 왔지?" 저런 거. 나. 김다혜. 삼십 년 넘게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순식간에 '저런 거'로 강등당하는 기분은, 씨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종류의 굴욕이었다.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주유소에서 진상 고객한테 욕먹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서은은 이미 궁중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몸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고, 사람들은 그걸 '성녀의 광휘'라 부르며 감탄했다. 하얀 드레스가 몸에 착 감기듯 걸쳐져 있었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다. 원래도 예쁘단 말을 듣던 애였지만, 저 빛까지 두르니 정말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그 빛 근처에도 못 가고 대리석 바닥에 무릎 꿇은 채, 궁정 마법사라는 노인이 내 머리 위로 손을 휘젓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노인의 손끝에서 옅은 파란 안개 같은 게 피어올랐다가, 내 머리 위에서 뭔가를 읽어내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직업... 확인되었습니다."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나를 쳐다봤다. 이상하게 뜸을 들이는 그 침묵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 표정, 저 표정 뭐야. 뭘 봤는데 저런 표정을 지어.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주유소... 점장이라 합니다." 순간 궁전 안이 정지했다.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침묵이 삼 초쯤 흘렀고, 그다음 누군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픽 소리를 냈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곧 홀 전체가 폭소로 뒤덮였다. "주유소라니, 그게 뭐요?" "성녀님과 동시에 소환되었다는 게 저런 잡스러운 직업이라고?" "만회소환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여기저기서 킥킥거리는 소리,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떠는 시녀들, 대놓고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귀족들. 나는 그 시선들 한가운데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뭐라고 대응하고 싶었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대체 뭘 어떻게 반박해야 하나. 만회소환. 나중에 알았지만, 성녀나 용사 같은 진짜 소환 대상이 불려올 때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끼워져 오는 부속품 같은 존재를 이렇게 불렀다. 즉, 나는 진짜가 아니라 진짜에 딸려온 사은품이었다. 마트에서 라면 사면 딸려오는 참기름 같은 존재. 그 참기름이 인간의 존엄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안 하는 것 같았다.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이 악물고 말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살아야 했으니까. 통장에 남은 돈이 얼마인지, 주유소 대출 이자가 얼마인지, 그 모든 절박함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내 입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여기서 밀리면 진짜 끝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이 세계에서든, 저 세계에서든, 나는 늘 그렇게 버텨왔으니까. 헌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조롱기가 짙게 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기회를 주지." 시종 하나가 낡은 마차 한 대를 홀 안으로 끌고 들어왔는데, 바퀴부터 몸체까지 흙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디서 저런 걸 구해왔는지, 마치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둔 것처럼 절묘하게 더러웠다. "저것을 처리해 보시오. 주유소, 라 했으니 뭘 할 줄 아는지." 나는 이를 악물고 마차 앞에 섰다. 주유. 주유는 기름을 넣는 거다. 그런데 저 마차에는 기름 넣을 데가 없었다. 애초에 이 세계에 내연기관이 없는데, 주유소 스킬이 대체 뭘 하는 스킬인지 나도 몰랐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조차 감이 안 왔다. 주유소에서 십 년 넘게 일하면서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였더라. 기름 넣기, 세차, 엔진오일 체크, 타이어 공기압 확인, 손님한테 영수증 건네기, 진상한테 웃으면서 욕 삼키기. 이 중에 이 세계에서 쓸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세차라도 해보겠습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내뱉었다. 소환 직전 주유소에서 세차를 하다 손에 쥔 채 함께 넘어온 낡은 걸레 한 장을 마차 바퀴에 갖다 댔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걸레가 흙을 조금 닦아낼 뿐, 반짝이는 빛도, 마나의 파동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 번 더 닦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세 번째로 닦았을 때는, 걸레에 흙물만 잔뜩 묻어났다. 웃음소리가 다시 터졌다. 이번엔 더 크게. "저것 좀 보시오. 걸레질이 스킬이라니." "성녀님과 함께 온 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저러다 마차까지 부수는 게 아닌지 모르겠소." 누군가의 조롱에 홀 전체가 다시 웃음으로 뒤덮였다. 나는 흙물이 묻은 손으로 걸레를 꼭 쥔 채, 이를 악물었다. 억울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새벽 다섯 시부터 밤늦게까지, 손님 한 명 한 명한테 웃으며 기름을 넣어주고, 겨울엔 손이 얼어붙는 것도 참으며 세차를 해주고, 그렇게 벌어서 대출을 갚아온 인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세계에선 그게 전부 웃음거리였다. 헌준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생겼다. 비웃음이었다.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는 그 모습이, 어찌나 여유롭던지, 마치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충분히 확인했다. 이건 실패한 소환의 부산물일 뿐. 왕국의 자원을 낭비할 이유가 없지." 부산물. 그 단어가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나는 부산물이 아니다. 사람이다. 김다혜라는 이름을 가지고, 서른 몇 해를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그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저기, 잠깐만요, 제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는 이게—" "추방하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사 둘이 내 팔을 붙잡았다. 억센 손아귀가 팔뚝을 파고들었고, 나는 저항할 새도 없이 몸이 붕 뜨는 걸 느꼈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잠깐만요! 잠깐만!" 서은은 그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는데, 나를 도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시녀가 건넨 차를 홀짝이며 딴 곳을 보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옆모습이, 지금 이 순간 나를 가장 서럽게 만들었다. "저기요, 서은씨! 나 좀!" 서은이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나를 쳐다봤다. 찻잔을 든 채,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그리고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말했다. "제가 왜요." 그게 다였다. 짧은 그 세 마디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들어본 어떤 말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병사들의 힘에 밀려 몸이 질질 끌려갔다. 대리석 바닥을 발끝으로 긁으며 버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거 놓으세요! 저기요! 잠깐만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홀 안의 시선들은 이미 나에게서 흥미를 잃은 듯했고, 몇몇은 다시 서은에게로, 몇몇은 저들끼리 대화로 돌아갔다. 나는 그렇게, 처음 도착한 세계에서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성문 밖 산속으로 내던져졌다. 등 뒤로 성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쿵, 하는 무거운 소리가 산속 전체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사라진 뒤에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남았다. 나는 낡은 걸레 한 장과 세탁기 한 대만을 끌어안은 채 낯선 숲 앞에 홀로 남겨졌다. 세탁기. 그것도 참 어이없는 이야기였다. 소환될 때 하필이면 내 옆에 있던 물건이 세탁기였다니. 걸레는 그렇다 쳐도, 이 무겁고 거대한 물건을 왜 함께 끌고 온 건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등에 짊어질 수도 없고, 굴리기도 힘든 이 쇳덩이를 앞에 두고, 나는 산속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몰랐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는지도 몰랐다. 해가 지면 산속에서 얼마나 위험할지도 몰랐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나는 그저 걸레 한 장과 세탁기 한 대를 끌어안고 숲 앞에 주저앉았다. 씨발, 진짜. 이게 무슨 개같은 상황이야. 주유소 대출금은 어떻게 되는 거지. 통장에 남은 잔액은. 부모님은 내가 사라진 걸 아실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숲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몰랐다. 방금 그 무의미한 걸레질이, 이 세계 전체를 뒤흔들 시작점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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