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워어어어어!
숲을 가르며 오크 무리가 튀어나왔다.
초록빛 피부에 근육으로 뒤덮인 몸뚱이, 어른 몸통만 한 몽둥이를 든 놈들이 열하나.
그 뒤로 유독 덩치가 큰 놈 하나가 도끼를 질질 끌며 걸어 나왔다.
숨소리부터 달랐다.
콧구멍에서 나오는 김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오는데, 저건 진짜 짐승이었다.
게임이었으면 로딩 화면에서 "보스 등장" 자막이라도 떴을 텐데, 여긴 그런 배려가 없었다.
"으, 으아아악!"
정우가 창을 떨어뜨렸다.
김민재는 화염구를 만들다가 손이 떨려 그마저도 실패했다.
불씨가 손바닥에서 픽, 하고 꺼지는 걸 보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건 화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담력이 부족한 거였다.
박서준만 남아서 자세를 잡았다.
"괜, 괜찮아. 내 육체강화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크 하나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쾅!
박서준이 겨우 막았지만, 그대로 5미터를 밀려났다.
"으어억!"
한소미가 내 팔을 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도현아, 우리 죽는 거 아니야?"
죽는 건 아직 아니지만, 이대로면 곧 그렇게 될 것 같았다.
15살짜리 몸뚱이로 죽는 것도 억울한데, 두 번째 인생에서 오크한테 맞아 죽는다는 건 더 억울했다.
적어도 전생에서는 과로사였는데, 이번엔 몽둥이사(死)라니.
사인이 너무 원시적이잖아.
나는 순간 머리를 굴렸다.
전생 32년, 이세계 15년, 통틀어 47년치 인생 경험을 이 순간에 쏟아부어야 했다.
살면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수능 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스킬 해석 발동]
[대상: 오크 리더]
[스킬: 광폭화 Lv.3]
[등급: C]
C등급이라고?
내 해석 등급은 F인데.
이건 마치 편의점 알바생이 대기업 임원 명찰을 훑어보는 느낌이었다.
보이긴 하는데 손댈 수는 없는.
[대여 시도]
[해석 등급 부족으로 대여 불가]
그럼 그렇지.
규칙은 규칙이었다.
F등급 해석으로는 C등급 스킬을 빌릴 수 없었다.
세상 참 공평하게 불공평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또 하나를 떠올렸다.
어제 여관 아저씨의 요리 Lv.1은 대여가 됐다.
Lv.1짜리 스킬만 대여가 가능한 건가?
아니면 F등급 해석으로 읽을 수 있는 만큼만 되는 건가?
가설을 세울 시간은 3초쯤 됐고, 검증할 시간은 없었다.
그냥 몸으로 때려보는 수밖에.
[스킬 해석 발동]
[대상: 박서준]
[스킬: 육체강화 Lv.2]
[등급: B]
박서준도 안 됐다.
B등급도 안 되는데, F로 읽을 수 있는 상한선이 낮았다.
이쯤에서 나는 확신했다.
등급 자체가 문제라는 걸.
레벨이 아니라 등급이 F의 목줄이었다.
남은 건 하나였다.
정우의 창술 Lv.1, 김민재의 화염술 Lv.1.
둘 다 등급이 F였다.
동급끼리 논다는 게 이런 데서 증명될 줄은 몰랐다.
[스킬 해석 발동]
[대상: 정우]
[스킬: 창술 Lv.1]
[등급: F]
[대여 시도]
[창술 Lv.1을 12분간 대여합니다]
됐다!
F등급끼리는 통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짜릿한지, 마치 편의점 랜덤 뽑기에서 처음으로 당첨 문구가 나온 기분이었다.
나는 떨어진 정우의 창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낯선 감각이 확 퍼졌다.
창 자루를 쥔 손이 마치 십 년은 다뤄본 것처럼 안정됐다.
손목이 저절로 각도를 잡고, 발이 저절로 무게중심을 바꿨다.
이게 대여 스킬이구나.
몸이 먼저 알고 머리가 뒤늦게 따라가는 감각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한소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너 뭐 숨긴 거 있냐'는 의심과 '제발 뭐라도 해줘'라는 애원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일단 도망칠 시간 벌게요."
촤르르르륵!
창을 크게 휘둘렀다.
오크 하나의 다리를 스치듯 베었다.
피가 튀지는 않았지만, 그놈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넘어지는 오크의 표정이 순간 억울해 보였는데, 그건 아마 내 착각이었을 거다.
짐승도 억울함을 느끼면 그건 좀 무섭잖아.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못 낚지, 오크 열두 마리는.
하지만 시간은 좀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워야단은 못 낚아도 오크 하나 발목 정도는 걸 수 있지 않겠나.
이 정도면 하나님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었다.
"서준 씨, 지금 뭐라도 해야 되지 않아요?"
나는 넘어진 박서준에게 소리쳤다.
박서준이 겨우 일어나 자세를 다시 잡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그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 육체강화면"을 외치던 그 자신감은 어디 임대 놓고 왔나 싶었다.
"소, 소미야! 교섭 스킬로 뭐라도!"
박서준이 소리쳤다.
한소미가 다급하게 스킬을 발동했다.
"교, 교섭! 저희랑 싸우지 말고 그냥 지나가시면..."
목소리가 떨려서 협상이라기보다는 애원처럼 들렸다.
솔직히 나였어도 저 톤으로 말하면 안 믿었을 것 같다.
[스킬 해석 발동]
[대상: 오크 무리]
[분석: 지능 낮음, 협상 불가, 공격 본능 우세]
안 될 것 같았다.
짐승은 협상 안 받는다.
특히 배고픈 짐승은.
저놈들 눈빛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회식 메뉴판을 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메뉴판에 우리가 올라가 있었다.
나는 다시 창을 고쳐 쥐고, 이번엔 김민재를 향해 대여를 시도했다.
[대여 시도]
[정우의 창술 Lv.1 대여가 진행 중입니다]
[동시 대여 불가]
한 번에 하나씩만 되는구나.
또 하나의 규칙을 몸으로 배웠다.
이쯤 되니 억울했다.
스킬 하나 빌리는데 이렇게 조건이 빡빡할 거면, 최소한 설명서라도 좀 챙겨주지.
그워어어어!
오크 리더가 도끼를 들고 정면으로 달려왔다.
땅이 울렸다.
쿠웅, 쿠웅, 하는 발소리가 진짜 심장 박동보다 더 크게 들렸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이건 그냥 죽는 그림이었다.
누가 그려도 이건 '주인공 사망 엔딩'이라고 이름 붙일 그림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를 던졌다.
창으로 리더의 발밑 흙을 힘껏 파냈다.
[스킬 해석 발동]
[대상: 발밑 지형]
[특이사항: 진흙질, 최근 강수로 지반 약화]
간밤에 비가 왔었나.
날씨 얘기 할 때가 아닌데, 이 순간 그게 생명줄이 됐다.
날씨앱이라도 미리 확인했으면 좀 더 자신 있게 파냈을 텐데.
촤악!
진흙이 리더의 발을 붙잡았다.
육중한 몸이 잠시 균형을 잃었다.
오크 리더가 "어?" 하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는데, 그것도 내 착각이겠지.
"지금이에요! 다들 뒤로!"
나는 소리치며 정우와 김민재를 끌어당겼다.
박서준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소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섯이 동시에 결계 방향으로 달렸다.
뒤에서 오크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닥!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15살짜리 몸으로 이렇게 뛴 게 처음이었다.
전생에 헬스장 등록만 하고 안 갔던 걸 이 순간 후회했다.
그때 3개월 치 돈 아깝다고 러닝머신 한 번 안 탄 게 지금 이렇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우는 아직도 넋이 나간 얼굴로 뛰고 있었고, 김민재는 뛰면서도 손바닥에 불씨를 다시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와중에 포기 안 하는 근성은 인정해줄 만했다.
박서준은 한소미를 반쯤 끌고 가는 자세로 달렸는데, 그 모습이 의외로 믿음직스러웠다.
방금 전 자신감 넘치다가 개박살 났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결계 문이 저 멀리 보였다.
하지만 오크들의 속도가 우리보다 빨랐다.
거리가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다.
숫자로 치자면, 우리와 오크 사이 거리가 초당 1미터씩 좁혀지는 느낌이었다.
계산할 여유가 있다는 게 웃긴데, 이게 F등급 해석가의 직업병인가 보다.
이대로면 못 넘는다.
뭔가 하나가 더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