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했더니 국가급 재난이라니

2화

은하 쉐어하우스는 왕성 외곽, 오래된 상업 지구 뒷골목에 있었다. 담쟁이가 벽을 절반쯤 덮은 3층 건물이었다. 벽돌은 군데군데 색이 바랬고, 창틀은 낡은 나무였다. 대문 옆에는 작은 놋쇠 명판이 붙어 있었다. '은하 공동거주지'. 글씨가 오래되어 반쯤 지워져 있었다. 강도윤은 이곳으로 옮겨진 지 사흘째였다.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이 건물이 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이 바뀌었다. 복도는 깨끗했고, 바닥에는 티 하나 없었다. 계단 손잡이는 손이 닿는 곳마다 반질반질했다.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오래 사용된 것이었다. 신전에서 그를 데려온 여자는 한서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왕성 행정부 소속이라 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끝에는 늘 서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잉크와 종이, 그리고 오래된 먼지 냄새였다. 그녀는 걸음이 빨랐다. 강도윤이 뒤따르는 속도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었다. 마치 그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를, 뒤늦게 떠올린 것처럼. "이 세계에는 남자가 적습니다." 첫날, 한서윤은 그렇게 설명했다. 강도윤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여자였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봐도 똑같았다. "여덟 명 중 남자는 한 명 정도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귀합니다." 강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하니까 소중히 대해준다는 거죠?" 한서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 시선이 그의 얼굴에 고정됐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반대입니다." "네?" "귀한 것은 함부로 다뤄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하대하는 것이 오래된 관습입니다. 무시하고, 명령하고, 실수를 지적하는 것. 그게 정상입니다." 강도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저는……."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세계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협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소유물입니다." 한서윤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당신은 다르게 행동할 겁니다."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강도윤은 방 한가운데 서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창밖으로 낯선 도시의 소음이 스며들어왔다. 마차 바퀴 소리, 누군가의 웃음소리, 멀리서 종이 울리는 소리. 익숙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쉐어하우스에는 세 명의 여자가 더 살고 있었다. 김하윤은 왕도 학술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그녀는 강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별거 없네." 강도윤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었다. 김하윤은 그 웃음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방문을 닫았다. 차은서는 검술도장의 후계자였다. 인사도 짧았다. "본다는 것이다. 강도윤이라 했나." "네." "그렇군." 그것으로 끝이었다. 차은서는 등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걸음마다 절제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강도윤은 그녀의 어깨선을 눈으로 좇았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검을 쥐는 사람의 몸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다. 발소리는 몇 번 들었다. 새벽에 조용히 나가고, 밤늦게 조용히 돌아오는 소리였다. 방문 앞에 흙 묻은 신발이 놓여 있는 것으로 존재를 짐작할 뿐이었다. 강도윤은 그들과 부딪힐 일이 없기를 바랐다. 사흘 내내 그는 최대한 조용히 지냈다. 밥때가 겹치지 않도록 신경 썼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먼저 벽 쪽으로 붙어 섰다. 그런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그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사흘째 되는 날 밤, 부엌에서 사고가 났다. 강도윤은 자신의 방에서 낮에 받은 왕성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종이는 낡았고 글씨는 알 수 없는 문자였다. 한서윤이 준 것이었다. 지도 위 표시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냄새가 났다. 처음엔 매운 냄새였다. 향신료 같은 것이 타는 냄새. 그 다음엔 탄내가 겹쳤다. 나무가 아니라 음식이 눌어붙는 냄새였다. 두 냄새가 동시에 코끝을 찔렀다. 부엌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냄비 뚜껑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이어 창문이 열리는 소리. 김하윤이 냄비를 태웠다. 매운 냄새와 탄내가 동시에 퍼졌다. 그녀는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손이 벌벌 떨렸다. "또, 또 이런 실수를……." 혼잣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멍청해서 그래. 매번 이런다니까." 목소리에는 짜증보다 더 무거운 것이 섞여 있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실망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냄비를 개수대로 옮기려다 손잡이가 뜨거워 다시 놓았다. 손끝이 붉게 부어 있었다. "아, 씨……." 강도윤은 냄새를 맡고 부엌으로 걸어왔다. 문턱에 서서 상황을 살폈다. 화로 위 냄비는 밑바닥이 시커멓게 눌어붙어 있었고, 그 위로 옅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김하윤은 그를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 창피함과 짜증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쳐다보지 마." 그녀는 팔로 냄비를 가리듯 앞으로 나섰다. 강도윤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뭐라고 말해야 상황이 나아질지 잠깐 생각했다. 강도윤은 냄비를 힐끗 보았다. 밑바닥이 새까맣게 눌어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 야채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패한 것 같았다. "불 조절이 어려웠나 보네요." "뭐?" 김하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목소리였다. "이 화로, 화력이 세게 느껴지던데. 저도 첫날 물 끓이다가 다 태웠어요." 거짓말이었다. 강도윤은 아직 부엌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말은 이미 나가 있었다. 김하윤의 눈이 커졌다. "...너도 그랬어?" "네. 이 화로 진짜 예민하더라고요. 불꽃이 순식간에 커지는 느낌이던데." 강도윤은 화로 손잡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실제로는 만져본 적도 없는 손잡이였다. 하지만 그럴듯하게 들리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 그렇지. 이게 좀 예민해." 그녀는 자신을 향한 비난을 화로 탓으로 옮겼다.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팔에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이런 화로는 학술원 실습실에도 있거든. 거기서도 다들 한 번씩은 태워봤다니까." "그렇죠. 처음 쓰는 물건은 다 그래요." "실수한 거 아니에요. 이런 화로면 누구나 태워요." 김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냄비를 씻으러 갔다. 물소리가 부엌을 채웠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는 것이 강도윤의 눈에 들어왔다. 우는 건지, 아니면 그냥 힘을 빼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강도윤은 그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부엌을 나왔다. 문턱을 넘으며 뒤를 한 번 돌아봤다. 김하윤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냄비를 씻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부엌 창밖 골목 어귀에 세워둔 소형 통신 결정석 하나가 옅게 빛을 냈다. 작은 빛이었다. 사람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약했다. 결정석 표면에 옅은 파문이 한 번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마치 물에 돌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김하윤이 손목에 차고 있던 학생용 통신구가 진동했다. 짧게 한 번, 그리고 조용해졌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이 결정석을 거쳐, 근처 통신망을 타고, 학술원 게시판 마법 회로에까지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 손목의 통신구는 물에 젖은 손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부엌은 여전히 탄내가 남아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밤바람이 그 냄새를 조금씩 밀어냈다. 강도윤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이 세계는 알던 세계와 많이 다르지만, 부엌에서 냄비를 태우고 창피해하는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하다고. 다음 날 아침, 학술원 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어제 저녁, 은하 골목 근처에서 이상한 위로의 파장을 느꼈다는 사람 있나요? 마음이 갑자기 편안해졌어요.》 댓글이 이백 개를 넘었다. 《저도요.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그 근처에 뭐가 있나요?》 《저는 그 시간에 도서관에 있었는데도 느꼈어요. 뭔가 따뜻한 느낌이었어요.》 《누가 결정석 근처에서 강한 감정 마법을 쓴 거 아닌가요? 신고해야 할 것 같은데.》 《신고할 필요까지야. 그냥 좋은 기운 아니었을까요.》 《좋은 기운이든 아니든 미등록 마법 파장이면 조사 대상이에요. 상식 아닌가요.》 댓글은 점점 길어졌다. 누군가는 그날 밤 자신이 있던 정확한 위치를 적었다. 누군가는 그 시간에 무슨 꿈을 꿨는지까지 적었다. 게시글은 학술원 학생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다. 한서윤은 아침 출근길에 그 게시글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서둘러 게시글의 시간과 위치를 확인했다. 저녁 무렵, 은하 골목. 정확히 겹쳤다. 그녀는 곧바로 게시글을 삭제 요청했다. 삭제는 됐지만 이미 캡처된 뒤였다. 한서윤은 걸음을 옮기며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계산했다. 남자가 이 도시에 들어온 지 사흘. 그리고 감정 공명 현상이 관측된 것이 사흘째. 우연이라고 하기엔 시점이 너무 정확했다. 그녀는 곧장 방향을 바꿔 마법기사단 지부로 향했다. 걸음이 아까보다 더 빨라졌다. 그날 오후, 왕성 마법기사단 내부 보고서에 짧은 문장이 하나 추가되었다. 《은하 골목 일대에서 원인불명의 감정 공명 현상 관측. 조사 필요.》 보고서에 서명한 사람은 부단장 윤세아였다. 윤세아는 서명을 마친 뒤 잠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으로 '은하 골목'이라는 글자를 두어 번 짚어보았다. 어딘가 낯익은 지명이었다. 최근 인사기록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서랍을 열어 최근 신전 이송 기록을 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장의 서류가 손에 잡혔다. 신전에서 왕성 외곽 은하 쉐어하우스로 이송된 인원 하나. 이름은 강도윤. 담당자는 한서윤. 윤세아는 서류를 든 채 미간을 좁혔다. "이건……." 그녀는 보고서와 서류를 나란히 놓고 다시 한 번 시간을 대조했다. 정확히 겹쳤다. 조사팀을 보내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 위 등불이 옅게 흔들렸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윤세아는 종이를 접어 서랍에 넣지 않고, 대신 자신의 품 안에 챙겨 넣었다. 내일 아침, 그녀는 직접 은하 골목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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