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기초만 20년, 은둔 고수

3화

타탁. 삼안멧돼지의 앞발이, 아이 머리 바로 위 허공에서 멈췄다.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뿌지지지직... 앞발 근처에서 유리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장벽. 내가 20년 동안 판 두 가지 중 하나. [출애굽기 14: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고 물이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지금 저 장벽은 바다를 가르는 급까진 아니지만, 멧돼지 발 하나 막는 데는 충분했다. 사실 이게 좀 억울한 부분인데, 성경에는 바다도 가르는 스케일로 나오지, 산속 멧돼지 앞발 막는 용도로는 안 나온다. 근데 뭐 어쩌겠나. 용도는 내가 정하는 거다. 그냥 내 재량이라고 해두자. 삼안멧돼지가 당황한 듯 눈 세 개를 굴렸다. "뭐야, 이게 뭔데." 하는 표정. 짐승도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처음 알았다. 눈이 세 개니까 저 당황한 표정도 삼중으로 겹쳐 보였다. 가운데 눈은 나를 보고, 양옆 눈은 자기 발을 보고, 그 와중에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멧돼지 표정 관찰할 시간에 얼른 아이부터 챙겨야 하는데, 나도 참 여유롭다. 서은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나를 봤다. 울다가 놀라서, 눈물이 얼굴에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콧물까지 흘러서 인중에 반짝반짝하게 붙어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그런 게 눈에 들어오는 나도 참 정신머리가 없다.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뛰지 않았다. 뛸 필요가 없으니까. 서두르면 오히려 얘가 더 놀랄 것 같았다. 드라마에서 보면 급하게 뛰어오는 어른보다 천천히 다가오는 어른이 더 안심시키는 그림이 나오지 않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거 다 카메라 앵글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삼안멧돼지가 나를 노려봤다. 그럴 만하다, 자기 사냥감을 방해했으니. 녀석 입장에서는 이제 막 저녁 메뉴가 정해지려는 참인데 갑자기 유리벽이 튀어나온 거니까, 나라도 저 표정 짓겠다. 으르르르릉... 녀석이 다시 앞발을 들어 이번엔 나를 향해 내려찍으려 했다. 아, 이번엔 타겟이 바뀌었구나. 멧돼지 나름의 우선순위 조정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튕겼다. 화르르륵! 녀석의 앞다리 하나가, 아주 정확하게, 발톱 끝부터 발목까지만 새까맗게 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딱 그 부위만. 탄화(炭化). 필요한 만큼만, 딱 그만큼만 태우는 것. 너무 세게 태우면 몸통까지 타서 시체 처리가 골치 아파지고, 너무 약하게 태우면 효과가 없다. 딱 필요한 만큼. 이게 은근 손맛이 필요한 기술이다. 불 조절 잘못하면 통구이가 되고, 또 잘못하면 그냥 화상 연고 발라주는 꼴이 된다. 20년 갈고닦은 손맛, 여기서 티가 난다. 삼안멧돼지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눈 세 개가 이번엔 겁먹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사냥꾼 표정이었던 눈이, 지금은 완전히 을의 입장이 되어서 나를 쳐다봤다. 저것도 나름 감정 변화라고 봐줘야 하나. 짐승도 학습 능력이 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 더 다가섰다. 발밑에서 낙엽 밟히는 소리가 났다. 바스락. 그 작은 소리에도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아까 그 사나운 기세는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로. "가라." 나는 그냥 그렇게 한마디 했다. 짐승이 내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지만, 뭔가 압력을 느꼈는지 몸을 돌려 산속으로 도망쳤다. 정확히는 압력이라기보다, 방금 자기 발 한쪽이 통닭집 다리처럼 됐다는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확률이 더 높다. 어쨌든 결과는 같으니까 상관없다. 쿠쿵쿵쿵! 멀어지는 발소리가 산을 흔들었다. 그 소리가 마을까지 들렸는지, 저 아래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 소리여!" "산 쪽에서 났는데!" 아, 이거 좀 곤란해졌다. 이 동네가 워낙 조용한 곳이라, 웬만한 소리는 다 마을 회관까지 다 들리는 구조다. 방음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방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산골이라서 그렇다. 일단은 앞에 있는 애부터 챙겨야 했다. 서은하는 그 자리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동공이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방금 산 채로 저녁 메뉴가 될 뻔했던 애다. 저 상태가 정상이다, 오히려 지금 벌떡 일어나서 뛰어다니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괜찮아?" 내가 물었다. 존댓말을 써야 하나 잠깐 고민했는데, 애 상대로는 그냥 반말이 편할 것 같았다. 낯선 사람 대할 땐 존댓말이 국룰이긴 한데, 이 상황에 그 격식 차리다가는 애가 더 얼어붙을 것 같았다. 서은하는 대답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욥기 33: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이 애가 지금 딱 그 표정이다, 살았다는 걸 실감 못 하는 표정. 숨은 쉬고 있는데 정신은 아직 삼안멧돼지 발톱 아래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은 그런 얼굴. 나는 손을 뻗었다. "일단 일어나.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생사가 오간 마당에 감기 걸린다는 소리를 하는 게 좀 웃기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딱히 다른 말이 안 떠올랐다. "방금 진짜 죽을 뻔했다" 같은 소리를 하면 애가 그 순간을 다시 곱씹을 것 같았고, "이제 안전해" 같은 말도 너무 뻔해서 입에 안 붙었다. 그래서 그냥 제일 만만한, 동네 할머니가 손주한테 할 법한 말이 튀어나왔다. 서은하가 손을 잡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까 그 장벽 앞에서 몇 분을 그렇게 앉아 있었으니 당연한 거긴 한데, 잡는 순간 이 손이 진짜 사람 손이구나 싶어서 괜히 마음 한쪽이 저릿했다. 됐고, 이런 감상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부터 처리해야 한다. 그 순간, 저 아래에서 사람들이 산길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강씨! 강씨! 거기 있는가!" 이장님 목소리였다. 저 목소리 뒤로 몇 명이 더 따라오는지, 발소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마 마을 청년회까지 죄다 몰려나온 모양이다. 아, 이제 진짜 곤란해졌다. 방금 그 장면을 누가 봤으면 큰일인데. 장벽 치는 거, 멧돼지 발 태우는 거, 그거 다 이 시골 아저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내가 손가락 튕겨서 불 뿜었다고 하면, 그거 무당집 손자쯤으로 소문 날 각이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엔 진짜로 나를 뭐 이상한 존재로 보고 경찰을 부를 수도 있고. 머릿속으로 벌써 온갖 시나리오가 빠르게 지나갔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방금 짐승 상대할 때보다 지금 인간 상대할 생각에 더 머리가 아프다. 일단 서은하를 부축해서 세웠다. 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세고 있었다. 쿵, 쿵, 쿵. 저 발소리들이 이 산길 굽이만 돌면 바로 여기, 이 장면이 훤히 보이는 자리에 도착할 거다. 장벽은 이미 걷혔지만, 유리 갈라지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탄화된 멧돼지 발톱 자국이 땅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설명할 말을 미리 준비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저도 방금 왔습니다" 식으로 밀어붙여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선수를 쳐서 "애를 구했습니다" 하고 영웅 행세를 해야 하나. 셀렉트할 옵션은 많은데, 시간은 별로 없었다. 이장님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강씨! 거기 뭔 일 있는 거여!" 목소리가 이제 확실히 코앞이었다. 나는 서은하의 손을 슬쩍 놓고, 자세를 고쳐 섰다. 표정 관리부터 해야 한다. 방금 산속에서 신적 권능으로 멧돼지 한 마리를 반쯤 구워버린 사람 얼굴이 아니라, 그냥 산길 걷다가 애 하나 발견한 평범한 아저씨 얼굴로.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잘 안 됐다. 왜냐면 아직도 콧속에 탄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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