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흰 선만 따라오면 살아요

4화

산소가 줄고 있다는 하늘의 말에, 파티 안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계기판을 넘겨보는 서하의 옆얼굴을 봤다. 숫자는 아직 위험 수준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다. 던전화된 공간은 외부와 공기 순환이 끊겨 있었다. 무너진 잔해가 유일한 통로를 막고 있었으니, 이 안의 공기는 딱 지금 여기에 있는 것뿐이었다. 처음 이 던전에 발을 들일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숫자로 확인하는 것과 그냥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무게였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강우가 물었다. "넉넉잡아 네 시간. 인원수 감안하면 그보다 짧을 수도 있고." 네 시간. 그 숫자가 공기 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하준을 슬쩍 봤다. 아이는 그 숫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뭔가 안 좋다는 걸 느낀 듯했다. 내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작은 손이었다. 그 손의 힘이 생각보다 셌다. "괜찮아. 우리 빨리 나갈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확신은 없었다. 다만 앞장서서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럴 때 안내인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나는 매번 새롭게 깨닫는다. 길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시간을 늘려줄 수는 없었다. 일행은 내가 가리킨 흰 선을 따라 좁은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는 원래 지하철 케이블 관리용으로 쓰였을 법한,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다. 헌터들의 장비 대부분이 이 통로에서는 짐이 됐다. 강철과 가죽, 활과 방패 같은 것들이 이렇게 거추장스러워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강우, 방패 좀 어떻게 안 될까." "이걸 어떻게 접어. 방패는 접는 물건이 아니야." "그럼 마법으로 줄여보든가." "내가 마법사냐." 결국 강우는 방패를 등에 매다는 방식으로 겨우 몸을 통과시켰다. 그 과정에서 방패 모서리가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인규가 나지막이 웃었다. "소리 좀 줄여요. 뭐 나오면 어쩌려고." "네가 활 메고 지나가 봐. 나보다 더 걸려." "내 활은 얇아." "얇아도 길잖아." 인규가 활을 벗어 손에 들고 앞으로 기어가던 중, 시위가 벽에 걸려 화살통이 쏟아졌다. 화살 십여 개가 바닥에 요란하게 흩어졌다. 그 소리가 좁은 통로 안에서 몇 배로 울렸다. "…미안." "괜찮아, 조용히 주워." 하늘이 낮게 웃으며 화살을 줍는 걸 도왔다. 그 와중에 그녀의 지팡이 끝이 내 등을 콕콕 찔렀다. "아, 죄송해요. 통로가 너무 좁아서." "괜찮습니다." 사실 안 괜찮았다. 등뼈 어딘가를 정확히 찍혔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앞장서서 흰 선을 따라 걸었다. 발밑에서 흙이 부스러지는 소리, 등 뒤에서 여섯 사람의 숨소리가 겹쳐 들렸다. 나는 그 숨소리들의 리듬을 세는 버릇이 있었다. 빨라지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한 번, 갈림길에서 흰 선이 갑자기 두 갈래로 나뉘는 걸 봤다. 나는 순간 멈춰 섰다. "왜 그래?" 서하가 물었다. "…길이 두 개로 보여서요." "둘 다 안전한 길이야?" "그런 것 같은데, 확실친 않아요." "확실친 않은 게 왜 이렇게 많아." 서하의 말에 나는 살짝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선이 두 개로 보이는 게 내 잘못은 아니었다. 흰 선은 원래 그런 식으로 존재했다. 정직하기도 하고, 가끔은 얄밉게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자 옆에서 인규가 끼어들었다. "동전 던지죠, 뭐." "동전이 어디 있어." "저 있어요." 인규가 주머니에서 오백원짜리 동전을 꺼냈다. 그 상황에 다들 잠깐 실소를 터뜨렸다. 지하 깊은 곳, 산소가 줄어드는 위기 상황에서 동전으로 길을 정한다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묘하게 분위기를 풀어줬다. 나조차 웃음이 나올 뻔했다. "뒷면 나오면 왼쪽, 앞면 나오면 오른쪽." "누가 정했어, 그 규칙." "내가 방금." 인규가 동전을 튕겼다. 좁은 통로 천장에 부딪혀 튕긴 동전이 바닥에 떨어지며 짧게 두 번 굴렀다. 모두의 시선이 그 작은 쇠붙이에 꽂혔다. 세상 진지한 표정들로, 오백원 동전 하나를 들여다보는 헌터들의 모습이라니. 나중에 생각해도 웃긴 장면이었다. 결과는 왼쪽. 일행은 왼쪽 길로 향했고, 다행히 그 길은 곧게 뻗어 있었다. "거봐, 안내인 감이 맞았네." 서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동전이 맞은 거죠, 제가 아니라." "둘 다 맞은 걸로 하자." "그럼 다음에 갈림길 나오면 동전으로 정하실 거예요?" "그건 아니지." 작은 소동들이 이어지는 사이, 파티와 나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좁아지고 있었다. 처음의 경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위에 다른 무언가가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신뢰라고 부르기엔 아직 일렀고, 그냥 동행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더 나간 무언가였다. "안내인 아저씨, 근데 저 진짜 배고파요." 하준이 불쑥 말했다. 그 말에 강우가 배낭에서 초코바를 꺼내 건넸다. "이거라도 먹어." "이거 유통기한 지났는데." "그런 걸 왜 확인해." "확인 안 하면 배 아파요." "안 지났어. 어제 산 거야." 하준이 초코바를 받아먹으며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조금 가벼워졌다. 아이 하나가 웃는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숨 쉴 틈은 생겼다. 그런데 그 가벼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통로 끝에 다다랐을 때, 산소 측정기가 다시 한 번 경고음을 냈다.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줄어." 하늘이 계기판을 다시 확인하며 얼굴을 굳혔다. "고장 아니에요?" 인규가 물었다. "이게 고장 나면 우리 다 죽어." "그럼 고장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하늘이 인규를 한 번 흘겨보고 다시 계기판에 집중했다. "통로 안쪽에서 뭔가가 산소를 소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서하가 앞쪽을 응시했다. 그 시선 끝에, 내 눈에도 무언가가 보였다. 붉은 선이었다.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고 짙은 붉은 선이 통로 안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마치 그 공간 전체가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굵기의 붉은 선을 본 적이 없었다. 얇은 실선, 손가락만 한 경고선, 그런 것들은 봤어도 이렇게 벽과 천장, 바닥까지 전부 삼켜버린 선은 처음이었다. "저 안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내 목소리가 처음으로,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럼 다른 길은?" 서하가 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흰 선은 그 붉은 선을 피해, 통로 벽 틈으로 이어지는 아주 좁은 균열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람이 겨우 몸을 비틀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었다. 균열 안쪽은 어두워서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좁아지는지도 가늠이 안 됐다. "저기로."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그 좁은 균열을 향했다. 강우가 방패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길 어떻게 들어가." "방패는 두고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이럴 거면 진작 얘기했어야지." "저도 방금 봤어요." "그건 그렇지." 결국 강우는 방패를 벗어 통로 벽에 세워뒀다. 무기 없이 몸만으로 좁은 틈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이, 헌터에게는 무장해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강우의 손이 방패를 쓰다듬을 몇 초 더 오래 머물렀다. 저 방패가 얼마나 많은 순간 그를 살렸을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활도 두고 가야겠네요." 인규가 자기 활을 보며 중얼거렸다. "화살통은 챙겨. 몸만 좀 접으면 될 것 같으니까." 하늘이 지팡이 끝을 짧게 줄이는 마법을 걸었다. 지팡이가 반으로 접히듯 짧아졌다. "그건 되네." "지팡이는 원래 이런 기능이 있어. 방패랑 활은 없고." "불공평하네." "세상이 원래 불공평해." "다들, 이거 하나만 믿고 가는 거야." 서하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에는 더 이상 의심이 없었다. 대신, 이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무게였다. 그 무게가 고스란히 나에게 옮겨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믿으셔도 됩니다."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내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소소한 갈림길이었다. 동전을 던지고 웃어넘길 수 있는 정도의 선택이었다. 이번엔, 진짜로 여섯 사람의 목숨이 내 눈에 보이는 선 하나에 달려 있었다. 하준의 손이 다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을 한 번 꼭 잡아줬다. "가자." 내가 먼저 균열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차가운 돌벽이 양쪽에서 어깨를 압박했다. 숨을 내뱉으며 몸을 더 좁게 만들어야 겨우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균열 안쪽에서, 뭔가가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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