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전 열한 시, 나는 여전히 이불 속에 있었다.
창밖으로 햇빛이 들어와 방바닥에 사각형 무늬를 그려놓았는데, 그 무늬가 조금씩 옆으로 밀려가는 걸 보면서도 몸을 일으킬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요즘 내 하루를 통째로 설명하는 말이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등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보일러를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 다음에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헷갈린다는 사실이 뒤따라왔다.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사라진 삶이었다. 예전엔 월요일 아침이 가장 무거웠는데, 지금은 모든 날이 똑같은 무게로 가라앉아 있어서 요일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숫자를 세는 버릇이 다시 시작됐다. 벽지 무늬 하나, 둘, 셋. 형광등 커버에 붙은 얼룩 하나, 둘. 아무 의미 없는 숫자 세기였지만, 그렇게라도 머릿속을 채우지 않으면 다른 생각들이 밀려들어왔다.
실업급여가 통장에 들어오는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매달 이십오 일, 백사십칠만 원. 그 숫자만큼은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어서, 다른 건 다 흐릿해져도 그 숫자는 또렷했다. 십 년 넘게 물류회사 자재관리팀에서 일하며 익힌 습관 중에 유일하게 남은 게 숫자를 잊지 않는 버릇이었고, 그 버릇이 이제는 통장 잔고를 세는 일에만 쓰인다는 게 우스웠다.
수급 기간도 계산해두고 있었다. 이번 달을 넘기면 여섯 달이 채워지고, 그 다음부터는 통장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을 거였다. 월세 사십오만 원, 관리비 팔만 원, 통신비 오만 원, 최소한의 식비까지 더하면 매달 지출은 대략 백만 원 남짓이었으니 급여가 끊기고 나면 남은 적금을 까먹는 일만 남아 있었다. 계산은 이미 다 끝나 있었다.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휴대폰을 열어 채용공고를 훑었다. 물류관리직, 자재기획팀, 재고관리 담당. 익숙한 단어들이 화면을 채웠지만, 경력 우대라는 문구 옆에 붙은 나이 제한과 신입 채용 위주의 조건들을 보고 있으면 손끝이 저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른일곱. 이 나이에 신입으로 다시 들어가라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한 공고에는 대리급 경력자 우대라고 쓰여 있었는데, 자격 요건 맨 아래 작은 글씨로 만 삼십오 세 이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 지원 버튼을 누를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넘겼다. 이런 식의 조건을 백 번쯤 넘게 마주하고 나면,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넘기는 손가락의 움직임만 남아 있었다.
한 시간쯤 그렇게 화면을 넘기다가, 나는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력서를 백 통쯤 넣어봐도 면접 연락이 오는 곳은 열 곳 남짓이었고, 그중에서도 실제로 채용까지 이어진 곳은 없었다. 우연이 셋을 넘으면 우연이 아니라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 년 가까이 이런 결과가 반복되는 걸 보면 이건 우연이 아니라 시장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한때는 면접 연락을 받으면 밤새 회사 정보를 검색하고 예상 질문을 정리했었다. 지금은 면접 일정 문자를 받아도 그저 캘린더에 표시만 해두고 준비를 미루다가 당일 아침에야 겨우 옷을 꺼내 입었다. 준비를 해도 결과가 같다는 걸 알게 되면 준비할 힘도 같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나는 이 년 동안 몸으로 배웠다.
부엌으로 나가 라면을 끓였다. 냄비에 물을 받아 불 위에 올려놓고, 그 앞에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오늘 하루 중 가장 몸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물이 끓는 동안 창밖을 내려다보니 건너편 상가 간판이 절반쯤 뜯겨 있었다. 저 자리에 있던 편의점도 작년에 문을 닫았고, 그 옆 세탁소도 올봄에 셔터를 내렸다. 세탁소 주인이 셔터에 붙여놓은 폐업 안내문은 아직도 그대로 붙어 있었는데, 색이 바래서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옆 부동산 사무소에는 요즘 들어 사람이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원래 저 자리는 분식집이었고, 그 전에는 문구점이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동네에 산 지 십오 년이 넘었으니 그 정도 변화는 눈에 훤했다. 이 동네 전체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느낌은 나 자신에 대한 느낌과 정확히 겹쳐졌다.
라면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에서는 게이트 관련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정부가 새로 지정한 등급별 던전 관리 지침이라던가, 어느 지역에 신규 게이트가 발견되어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었는데, 나는 그 뉴스를 딱히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 게이트는 나와 상관없는 세계의 일이었다. 헌터라는 직업도, 각성자라는 존재도, 다 텔레비전 화면 안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였고, 나는 그 화면 밖에서 라면 국물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화면 아래 자막으로 지나가는 숫자들은 눈에 들어왔다. 등급별 몬스터 토벌 보상금, 클리어 실패 시 게이트 확장 위험도, 헌터 협회 소속 인원 현황. 숫자가 나오면 자동으로 눈이 따라가는 버릇은 실업급여 통장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습관이었다. 다만 그 숫자들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게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다.
앵커는 이번에 발견된 게이트가 삼 등급으로 판정되었고, 인근 주민들에게는 대피 안내가 내려졌다고 말했다. 화면 속 지도에 붉은 원이 그려졌다. 나는 그 붉은 원이 그려진 지역과 내가 사는 동네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붉은 원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화면 안과 밖의 경계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씻는데, 손끝에 물이 닿는 감각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요 며칠 손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서류를 넣고, 답을 기다리고, 다시 넣고, 다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손으로 할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한빛물류에서 일할 때는 하루에도 수백 건의 자재를 손으로 만졌다. 입고된 박스의 무게를 손끝으로 가늠하고, 파렛트 위에 쌓인 재고를 눈으로 훑어 수량이 맞는지 확인하는 일이 몸에 배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손이 할 일이 없어서 자꾸 허공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 회사에서 십일 년을 다녔다. 신입으로 들어가 자재관리팀 대리, 과장까지 승진했고, 마지막 삼 년은 팀장 대리 역할까지 겸했다.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박스 하나의 무게를 손으로 들어보면 대략적인 중량 오차를 잡아낼 수 있었다. 십 킬로그램짜리 상자가 십일 킬로그램 넘게 나가면 그 안에 뭔가 잘못 들어갔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오배송을 여러 번 잡아냈었다. 회식 자리에서 팀장이 그 얘기를 자랑처럼 꺼내곤 했다. 우리 팀에 손이 저울인 사람이 있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게 자랑이 아니라 그냥 내가 이 일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손이 저울 노릇을 할 데가 없어졌다.
회사가 부도 처리되던 날도 기억하고 있었다. 본사 회의실에 팀장급 이상만 모아놓고 대표가 직접 상황을 설명했는데, 대표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은 계속 서류철 모서리를 만지고 있었다. 그 손을 보면서 나는 이미 답이 나왔다는 걸 알았다.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던 날, 팀장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 미안하다는 말에는 미안함이 한 톨도 없었다. 그저 절차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부담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릇을 다 씻고 방으로 돌아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오후 한 시가 넘어 있었고, 이렇게 흘려보낸 하루가 또 하나 쌓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목구멍 아래쯤에서 뜨겁게 올라왔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이런 식으로 하루를 흘려보내는 게 벌써 몇 달째인지 헤아려봤다. 정확히 세자면 여덟 달쯤 되었을 텐데, 정확한 숫자를 세는 것조차 이제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예전에는 숫자를 세는 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는데, 지금은 숫자를 셀수록 초라해지기만 했다.
벽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데, 시선이 문득 벽 아래쯤에 멈췄다.
거기, 낡은 벽지 아래로 작게 벌어진 틈이 있었다.
예전부터 있던 균열인지, 아니면 최근에 생긴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조금 일으켜 그 틈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다만 그 틈의 색이 이상하게 짙었다. 벽지 뒤로 시멘트가 갈라진 자리는 보통 회색이나 흙빛이어야 정상인데, 저 틈은 마치 먹물을 부어놓은 것처럼 새까맸다.
손을 뻗어 벽지 가장자리를 살짝 들어봤다. 벽지 안쪽은 눅눅하지도 않았고 곰팡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냥 색만 이상하게 검었다. 손끝으로 그 틈 주변을 눌러보니 벽 자체는 단단했다. 균열이 확장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저기에, 이상한 색으로, 조용히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넣어야 하나 잠깐 생각했다. 이 아파트는 지은 지 삼십 년이 넘은 건물이라 벽 갈라지는 일이 흔했고, 지난겨울에도 옆집에서 비슷한 신고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시멘트 노화 현상이라고 결론이 났었다.
나는 그 틈을 잠깐 바라보다가, 별일 아니겠지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는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낡은 아파트에서 벽 갈라지는 건 흔한 일이었고, 관리사무소에 전화 한 번 넣으면 될 일이라고만 여겼다.
이불을 다시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창밖의 사각형 무늬는 이제 방 안쪽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그 무늬가 벽 아래 그 틈 근처까지 다가가고 있다는 걸 나는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때는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