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음을 서빙하다

5화

다음 날, 예고된 손님이 왔다. 전날 밤 박정만이 예약 명단을 보여주며 한숨을 쉬었던 게 생각났다. 이름 옆에 별표가 세 개나 붙어 있었다. 별표 하나짜리 손님도 벌벌 떨었는데 세 개짜리는 대체 뭔가 싶었다. 물어봐도 대답은 안 해줬다. 그냥 "내일 알게 될 거야"라는 말뿐이었다. 오늘이 그 내일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달랐다. 딸랑, 하는 종소리가 아니라 낮게 울리는 종소리였다. 종 자체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저 종을 누가 몰래 바꿔 단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이 가게였다. 들어온 여자는 키가 크고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걸음마다 바닥이 살짝 얼어붙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정말로 발자국 자리마다 서리가 맺혔다. 하얀 결정이 대리석 바닥 위에서 반짝이다가 서서히 녹아 사라졌다. 마치 발자국 자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어서 오세요." 박정만이 인사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3년차인 사람도 떨린다는 게 오히려 안심이 됐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박정만의 손끝이 쟁반을 쥔 채로 살짝 흔들리는 걸 봤다. 저 사람이 저렇게 떠는 걸 처음 봤다. 여자가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는 동작마저 우아했다. 마치 의자가 원래 그녀를 위해 놓여 있었던 것처럼. 나를 힐끗 보더니 픽 웃었다. "신입이네."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는데, 그게 더 무서웠다. 사람을 놀리는 게 아니라 관찰하는 웃음이었다. "이도현입니다." 또 반사적으로 인사가 나갔다. 몸이 알아서 움찍하는 게 신기했다. 여자가 재밌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인사성 밝네." 주문은 간단했다. 코스 요리 전부. 술은 가장 독한 걸로. 나는 메뉴판을 펼치려다 그냥 접었다. 저 손님은 메뉴판을 볼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이미 다 정해놓고 온 사람처럼. 주방으로 물러섰다. 뒤통수가 뜨거웠다. 계속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등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저 손님 뭐예요." 주방에서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몰라. 처음 보는 얼굴이야." 김민석도 처음이라고 했다. 도마 위에서 칼질하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 잠깐의 멈춤이 더 신경 쓰였다. 하유리만 아는 눈치였다. 그녀는 요리를 준비하며 표정이 평소보다 조금 굳어 있었다. 하유리 표정이 굳는 걸 처음 봤다. 늘 무심하다 못해 지루해 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셰프님, 저 손님 아세요?" "조심해서 나가." 하유리가 처음으로 그런 말을 했다. 경고처럼 들렸다.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등급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조심하라고만 했다. 그게 더 불안했다. 설명이 없는 경고가 제일 무섭다는 걸 여기 와서 배웠다. 나는 접시를 들고 다시 홀로 나갔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려졌다는 걸 나 자신도 알아챘다. 첫 요리를 내려놓는 순간, 여자가 손끝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살짝 만졌다. 지지직. 작은 얼음 결정이 접시 테두리를 따라 퍼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접시 전체가 서리로 덮였다. 방금 주방에서 나온, 아직 김이 오르던 요리였는데, 그 열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걸 눈앞에서 봤다. 요리 위에 얹혀 있던 소스가 그대로 얼음처럼 굳었다. "이거 다시 데워와." 여자가 명령했다. 목소리에 짜증이나 불만은 없었다. 그냥 당연한 걸 요구하는 투였다. 나는 접시를 다시 들었다. 손끝이 시렸다. 얼음이 손바닥에 그대로 옮겨붙는 것 같았다. 순간 손가락이 접시에 붙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시린 감각은 팔뚝까지 타고 올라왔다. 주방으로 돌아가며 손을 봤다. 살짝 하얗게 변해 있었다. 동상 같았다. 손끝의 감각이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손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손 괜찮아?" 김민석이 물었다. 접시를 받아 다시 불 위에 올리면서도 내 손을 계속 쳐다봤다. "괜찮아요." 안 괜찮았는데 그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서 안 괜찮다고 말해봤자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손님이 밖에 앉아 있는 이상, 어쨌든 이 손으로 접시를 다시 들고 나가야 했다. "얼음찜질이라도 해." "불이 얼음이면 어떻게 찜질을 해요." 실없는 소리가 나왔다. 김민석이 짧게 웃었다. 웃을 상황은 아니었는데,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다들 여기 좀 이상해진 것 같았다. 다시 데운 요리를 들고 나갔다. 여자는 이번엔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냥 먹었다. 조용히,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다루는 손놀림이 지나치게 정교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밥 먹는 흉내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더 무서웠다. 식사가 끝날 무렵, 여자가 나를 불렀다. "너." "네." "손 줘봐."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규칙 위반인가 싶었는데 이미 손을 내밀고 있었다. 늦었다. 머릿속에서 '이거 규칙 몇 조 위반이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손은 이미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여자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얼음장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린 게 아니라 따뜻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마치 얼음 속에서 불씨가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하얗게 변했던 손가락 끝에 다시 핏기가 돌아왔다. "동상 낫게 해줬어. 감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착하네." 여자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다시 서리를 남겼다. "계산은 셰프한테 해. 다음에 또 올게."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나갔다. 문이 닫히자 홀 안 온도가 확 올라간 것 같았다. 실제로 온도가 그랬는지, 내가 그렇게 느낀 건지는 몰랐다. 벽에 걸린 온도계를 봤는데 딱히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도 등에 배어 있던 냉기가 스르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박정만이 나에게 다가왔다. 표정이 아까보다 더 걱정스러워 보였다. "괜찮아? 손 데인 거 아니지?" "동상 걸렸다가 나았어요." "저 손님이 고쳐준 거야?" "네." 박정만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안심과 불안이 반쪽씩 섞인 얼굴이었다. "드문 일이야. 저런 등급 손님이 직접 손대는 거." "저런 등급이 어느 정도인데요?" "나도 자세히는 몰라. 별표 세 개짜리는 나도 처음 봤어." "좋은 뜻이었을까요?" "몰라. 좋은 뜻일 수도, 마킹일 수도." "마킹이요?" "관심 있다는 표시. 다음에 또 찾아올 거란 뜻."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판단이 안 섰다. 나는 그저 손을 내려다봤다. 흔적은 없었다. 완벽하게 나아 있었다. 살짝 남아 있던 하얀 자국도 사라지고, 원래의 살빛이 그대로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게 더 이상했다. 그날 밤 근무가 끝나고, 나는 처음으로 하유리에게 먼저 다가갔다. "셰프님." "뭐." "저 오늘 어땠어요?" "살아남았잖아." "그게 기준인가요?" "여기선 그게 최고 기준이야." 하유리가 조리대를 정리하며 말했다. 칼을 하나씩 제자리에 넣는 손길이 익숙했다. 그리고 잠깐 멈추더니 나를 봤다. "너 재능 있어." "재능이요?" "버티는 재능. 다들 없는 거." 칭찬인지 저주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버티는 재능이라니,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술 마시다 전신주랑 싸우고 죽으면서 마지막 말이 "난 전신주를 이겼다"였던 사람. 그 무모함과 우직함이 나한테도 조금은 흘러들어온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웃음이 났다. 실없는 웃음이었다. "뭘 웃어." "아니에요. 그냥." "이상한 애네." 하유리가 그렇게 말하고 앞치마를 벗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오늘 하루 내가 무사히 넘긴 게 순전히 운이었는지 아니면 저 말대로 재능인지 헷갈렸다. 집으로, 아니 그 좁은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복도 끝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낮은 라디오 소리 같은 거였다. 뉴스 앵커 목소리였다. "...법무부는 오늘 오전, 특수 격리 시설에 수용 중이던 마녀 한 명의 형기 만료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해당 마녀는 과거 세 개 왕국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진..." 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라디오가 꺼진 건지 내가 발걸음을 옮긴 건지 몰랐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봤지만, 소리가 나던 문 안쪽은 조용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세 개 왕국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왜 지금 그 소리가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목의 낙인이 다시 한 번 뜨겁게 조여왔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 개 왕국을 파괴했다는 마녀와, 오늘 낮에 내 손을 잡고 웃던 그 여자가 자꾸 겹쳐졌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바로 지워버렸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손목의 낙인은 그 생각을 비웃듯 계속 뜨거웠다.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아직 그게 뭔지 몰랐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사실에만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그 한 문장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고, 낙인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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