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자의 덫과 회귀

3화

왕태자 처소로 옮긴 첫날, 나는 이곳이 지금까지 있던 궁녀 숙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긴장감으로 채워져 있다는 걸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느꼈다. 복도를 오가는 시위들의 걸음걸이부터 다르고, 발소리조차 규칙적으로 맞춰 걷는 듯한 그 절제된 움직임을 보며 나는 여기가 보통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상궁의 목소리마저 평소보다 낮게 깔리는 걸 보며 나는 여기서 실수 한 번이면 그대로 짐을 싸야 할 거라는 계산이 빠르게 섰다. '역시 스펙업은 리스크가 따르는구나.' 궁녀 생활 몇 달 만에 승진 비슷한 걸 했다고 좋아했더니, 정작 옮겨온 곳은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랄 자리였다. 짐을 옮기던 동료 궁녀 하나가 나를 보며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는데, "언니, 몸조심해요. 여기 사람들 눈빛이 다 칼 같아." 라는 그 한마디가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배정된 첫 업무는 차 시중이었는데, 나는 다과상을 들고 들어가기 전 손이 떨리지 않도록 심호흡을 세 번이나 했다. 상궁이 옆에서 나지막이 일러준 순서를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기며, 찻잔의 방향과 다과의 배열까지 신경 써서 맞췄다. 이 정도로 준비했으면 실수할 일은 없겠지 싶었는데, 사람 일이란 늘 그렇듯 방심한 순간에 벌어진다는 걸 나는 곧 다시 배우게 되었다. 왕태자 이헌은 서류를 넘기며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고, 나는 그 무관심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느끼며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시선을 받는 것보다야 무시당하는 게 백배 낫지, 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상 위에 놓인 벼루가 살짝 기울어져 있다는 걸 발견한 나는, 별생각 없이 손을 뻗어 그걸 바로잡으려다 그만 소매로 먹물을 건드리고 말았다. 검은 얼룩이 서류 귀퉁이로 번지는 걸 보며 나는 이제 정말 끝났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혔는데, 머릿속에서는 이미 내가 궁 밖으로 쫓겨나 짐 보따리를 들고 걸어가는 장면까지 그려졌다. '내 궁녀 인생 여기서 끝나는구나.' 그런데 놀랍게도 이헌은 그 얼룩을 슬쩍 보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서류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괜찮다. 다시 쓰면 될 일이다." 그 짧은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는데, 궁궐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 실수를 이렇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넘겨준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이었다면 벌써 상궁의 손바닥이 내 등짝을 몇 번은 후려쳤을 텐데, 이 사람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저 서류만 밀어놓았다. '차갑다고 소문난 분이 이렇게 순순히 넘어간다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감사를 표하면서도 속으로는 이 상황이 낯설어서 자꾸 곱씹었다. 그가 다시 붓을 들어 새 서류를 펴는 손끝을 나는 몰래 훔쳐보았는데,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단정해서 마치 붓을 쥐기 위해 태어난 손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이내 그런 쓸데없는 감상은 접어두자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목숨줄이나 붙잡는 게 우선이었다. 며칠 뒤 나는 후원을 지나다가 화려한 자수 두루마기를 걸친 남자와 마주쳤는데, 그가 다름 아닌 이헌의 이복형인 왕자 이강이라는 걸 알아본 건 그의 뒤를 따르던 시종이 예를 표하는 걸 보고서였다. 이강은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었고, 지나가던 궁녀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안부를 건네는 태도로 이미 궁 안에서 인기가 상당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후원 곳곳에서 그를 알아본 궁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서로 팔을 붙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아, 저분이 그 유명한 다정한 왕자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거기, 자네는 새로 온 궁녀인가?" 이강이 내게 먼저 말을 건 순간, 나는 신분 차이를 생각해 급히 고개를 숙였고 그는 오히려 그런 격식이 불편하다는 듯 손을 저으며 웃었다. "편하게 굴어도 돼. 나는 그런 거 안 따지거든." 그 말투가 지나치게 친근해서 나는 순간 경계심을 늦출 뻔했는데, 곧 궁궐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건 그저 그의 성격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럼에도 나는 발끝을 슬쩍 뒤로 빼며 거리를 두었는데, 아무리 편하게 대해준다 해도 왕족은 왕족이었고, 나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의 궁녀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는 없었다. "동생 처소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이강이 대화를 이어가며 슬쩍 던진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짧게 답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생각 없다는 듯 웃었다. "그 녀석 곁에 있으려면 고생 좀 하겠어. 워낙 정이 없는 편이라." 형제 사이의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던 그 말이 나중에 어떤 의미로 되돌아올지는 그때의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고, 나는 그저 왕족들도 형제끼리는 저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신 것 같던데요." 나는 조심스레 그렇게 대답했는데, 이강은 그 말에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오, 그래? 자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건가." 그의 시선이 잠깐 나를 훑고 지나갔는데, 그 짧은 순간의 눈빛이 방금까지의 다정함과는 조금 다른 색을 띠고 있어서 나는 괜히 뒷목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순식간이었고, 이강은 다시 예의 그 다정한 웃음을 되찾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이강은 그 뒤로도 잠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궁 밖 저잣거리에서 파는 떡이 맛있다는 이야기부터, 요즘 후원에 핀 꽃이 예년보다 늦게 폈다는 이야기까지, 딱히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편하게 풀어놓았다. 그러다 다시 걸음을 옮겼는데, 떠나기 전 그가 남긴 한마디가 유독 귀에 걸렸다. "또 보지, 이름이 뭐였지?" "한서윤입니다." 내 이름을 되뇌며 그가 지어 보인 미소는 지나치게 다정해서, 나는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와서도 그 미소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이상하게도 그 미소는 따뜻하다기보다는, 마치 잘 만들어진 가면처럼 정교해서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는데, 나는 그게 그저 왕족 특유의 예의범절 때문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반면 이헌의 처소는 여전히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나는 그 서늘함 속에서 오히려 이상한 안정감을 느꼈다. 시위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으로는 이헌이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는데, 실제로 며칠간 지켜본 바로도 그는 잘못을 저지른 시녀를 큰소리로 나무라는 대신 조용히 짚어주는 쪽을 택했다. 한번은 다른 시녀가 그의 옷을 다리다 태워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는 그저 짧게 "다음부터는 온도를 조금 낮춰라" 하고 말했을 뿐, 화를 내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차갑다는 소문이랑 실제는 다르네' 하고 몰래 고개를 갸웃거렸다. 겉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실제 겪어본 모습 사이의 간극이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낯선 궁궐 생활에서 내가 처음으로 품게 된 개인적인 호기심이었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등불을 끄기 전, 나는 오늘 있었던 두 왕족과의 만남을 번갈아 떠올리며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쪽은 소문과 달리 다정했고, 한쪽은 소문 그대로 다정했다. 겉으로 보기엔 완전히 대칭적인 두 사람이었지만, 나는 왜인지 그 대칭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어둠 속에서 이불을 끌어당기며 나는 이강이 떠나기 전 남긴 눈빛을 다시 떠올렸는데, 그 눈빛이 웃음 뒤에 숨겨둔 어떤 계산 같아서 자꾸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궁궐이라는 곳에서 우연이란 게 얼마나 드문 것인지, 나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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