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자의 덫과 회귀

5화

그 예감이 확신에 가까워진 건 어느 늦은 오후, 이헌의 처소 마당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볕이 좋아서 정원사 아저씨가 오랜만에 화분들을 양지바른 쪽으로 옮기겠다며 나를 붙잡았는데, 궁녀 일이라는 게 원래 이것저것 다 하는 잡무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므로 별생각 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옷이라도 튼튼한 걸로 입었을 텐데.' 화분 하나를 안고 몇 걸음 옮기던 참에 전날 내린 비로 물기가 남아 있던 흙바닥이 발밑에서 미끄덩, 하고 배신을 때렸다. 나는 화분을 놓칠세라 두 팔로 끌어안은 채 그대로 진흙탕 위에 철퍽 엎어졌는데, 화분은 지켰지만 정작 내 옷은 지키지 못했다는 게 이 참사의 핵심이었다. 옷이 온통 흙투성이가 된 채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던 그 순간, 마침 지나가던 이헌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지금. '차라리 아무도 안 볼 때 넘어졌으면 좋았을걸.' 그의 짙은 눈이 위에서 아래로 나를 훑는 것 같아서 나는 순간 숨쉬는 법을 잊었다. "괜찮으냐." 짧은 물음이었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흙물을 내려다보는 순간 이보다 더 창피한 순간이 있을까 싶었다. '이러다 신입 궁녀 흑역사로 전당에 오를 판이네. 후대에 전해지는 궁녀 실수담 1위, 화분 안고 넘어진 여자.' 손끝이 흙투성이인 걸 뒤늦게 깨닫고 나는 슬그머니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놀랍게도 이헌은 웃음기 하나 없이 손을 소매 안으로 넣더니 하얀 손수건을 꺼내 내밀며 옷을 대충이라도 닦으라고 했는데, 그 무심한 배려가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다. 웃기라도 했으면 그냥 놀리는 건가 하고 넘겼을 텐데,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손수건을 내미는 그 태도가 사람을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전하의 손수건을 이런 데 쓸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사양하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쓰라고 준 것이다. 사양이 길면 더 번거로워질 뿐이다." 그 대답이 어딘지 다정함을 감추려는 사람 특유의 어색함처럼 들려서, 나는 결국 손수건을 받아 옷자락을 닦으며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사양이 길면 번거로워진다니, 그건 또 무슨 논리인지. 전하께서 화법을 좀 다정하게 배우셨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도 내 손에 쥐인 손수건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는 건, 그때는 애써 모른 척했다. 그날 저녁, 나는 손수건을 세탁해 돌려주려고 처소를 찾았는데 마침 문 앞에서 이강과 마주쳤다. 초록빛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정갈했는데, 그 정갈함이 오늘은 왠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는 내 손에 들린 손수건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거 동생 것 같은데."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진흙탕에 엎어진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커졌는데, 창피했던 기억을 남에게 말하다 보니 그게 또 새삼스레 창피해졌기 때문이다. 이강은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의 결이 평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는 걸 나는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동생이 그런 것까지 챙겨준다니, 의외네." 이강의 목소리에 담긴 옅은 냉소를 나는 그저 형제 사이의 장난스러운 견제 정도로 흘려들었다. '형제끼리도 저렇게 비교하고 사는구나. 나도 언니랑 저런 식으로 신경전 벌인 적 있었는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처소 안으로 들어섰다. * * * 이강, 나는 그 손수건을 보는 순간부터 계산이 빨라졌다. 동생이 궁녀 하나에게 저런 사소한 호의를 베푼다는 게 알려지면, 그 아이의 지나치게 완벽하다는 평판에 균열을 낼 좋은 재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동시에 이 궁녀를 좀 더 가까이 두면 동생의 동선과 습관을 파악하는 데 이만한 통로가 없겠다는 계산도 뒤따라왔다. 왕좌라는 게 원래 이렇게, 사소한 손수건 한 장에서도 냄새를 맡아야 하는 자리다. 나는 겉으로는 별생각 없다는 표정을 유지한 채 서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는데, 등을 돌리는 순간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는 데는 채 반 걸음도 필요하지 않았다. '순진해서 다루기 쉬운 타입이군.' 이 정도로 쉽게 마음을 여는 아이라면, 동생 곁에 심어둘 눈 하나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처소 회랑을 지나며 지나가는 시위대와 눈인사를 나눴다. 다들 나를 향해 예를 갖췄지만, 그 예 안에 담긴 미묘한 계산까지 모를 리 없었다. 왕위를 향한 길이 얼마나 좁고 험한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 길을 넓히기 위해서라면 사람의 마음 하나쯤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내가 이 궁궐에서 배운 유일하고 확실한 교훈이었다. 손수건 한 장, 궁녀 한 명, 그렇게 작은 것들이 모여서 결국 큰 균열을 만든다는 것도. 나는 걸음을 옮기며 다음 수를 가늠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씨앗은 천천히 심어야 오래 자란다. * * * 며칠 뒤, 이헌의 처소로 향하던 길에 나는 궁녀들 사이에서 낮게 오가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빨래를 널며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었는데,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늦추고 귀를 기울였다. "요즘 두 전하 사이가 심상치 않다더라." "그야 왕위 계승 문제잖아,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그래도 예전엔 그럭저럭 사이좋아 보였는데, 요즘은 서로 마주치지도 않는다더라." 이복형제 사이의 계승 다툼이라는 말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 소문의 무게가 예전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진 건 아마 내가 이제 그 두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손수건을 내밀던 무뚝뚝한 손, 그리고 그 손수건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리던 또 다른 얼굴이 동시에 떠올라서 속이 묘하게 뒤틀렸다. '괜히 여기 낀 거 아니야.' 순간 스치는 불안을 애써 눌러내며 나는 걸음을 재촉했지만, 처소에 도착해서도 그 소문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는 원래 이런 일에는 발을 담그지 않는 게 신상에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궁궐 생활 몇 달이면 그 정도 눈치는 저절로 생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이 자꾸 이 처소로 향한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날 밤 이헌은 평소보다 늦게까지 서류를 붙들고 있었는데, 촛불 아래서 미간을 좁힌 채 문서를 넘기는 옆모습이 마치 조각가가 아직 다 끝내지 못한 대리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차를 새로 내가자 그는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물었다. "요즘 궁 안 소문이 많이 도는 모양이던데." 그 질문에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컹했지만,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아는 게 별로 없었으니까. 형제간 다툼이라는 큰 틀만 알 뿐, 그 속의 진짜 사정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헌은 그 대답을 듣고 짧게 웃었는데, 그 웃음에는 이제까지 본 것과는 다른 종류의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한숨의 다른 형태 같았다.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그 등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 궁궐의 평온함이 생각보다 훨씬 얇은 얼음판 위에 놓여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얼음 밑에서 뭔가가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갈라지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때는 그 얼음판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갈라질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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