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적국의 천재 인질

2화

별채로 돌아온 나는 낡은 서랍을 열었다. 끼익, 하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유품 몇 가지가 담겨 있었다. 손수건, 낡은 반지, 그리고 편지 한 장. 손수건은 색이 다 바래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도 짐작하기 힘들었다. 반지는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단순한 은반지였다. 값어치로 따지면 하녀들이 차는 장신구보다도 못할 물건들. 하지만 나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었다. 어머니, 윤지수. 평민 출신이었지만 누구보다 지적이고 아름다웠던 여자. 아버지와의 사랑은 신분을 초월한 이야기였다고, 어릴 적 유모에게 들었다. 처음엔 두 사람이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다고. 유모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누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아가씨, 그때 나리께서 마님을 보는 눈빛이 어땠는지 아세요? 세상에 그런 눈빛은 다시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랑은,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똑똑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귀족 사회의 연회에서 어머니가 경제 정책에 대해 명료하게 논하자,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고 했다. "부인, 지금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할 자리가 아니오." 낮게 깔린 목소리, 그리고 뒤이은 정적.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의 시선이 순간 아버지에게로 쏠렸을 것이다. 저 집 안주인이 저리 명석한데, 가주는 뭘 하고 있느냐는 무언의 비웃음.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아버지는 백작가의 딸을 새 부인으로 들였다. 어머니는 별채로 밀려났고,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어머니는 지적인 여자로 태어난 죄로 버림받았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닮은 죄로 19년을 갇혀 살았다. 웃긴 건, 나 역시 어머니의 지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정치학, 경제학, 역사. 어머니는 별채라는 좁은 공간에서도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낮에는 바느질을 배우는 척, 밤이 되면 촛불 아래서 두꺼운 책을 펼쳤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늘 조용했지만 또렷했다. "서연아, 이 나라의 조세 제도가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알아? 겉으로는 백성을 위한다지만, 실은……."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눈을 반짝였다. 세상의 이치를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웠다. 왜 그렇게까지 가르쳤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네 안에 있는 것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니까." 그 말을 할 때 어머니의 눈빛은 단단했다. 마치 세상 전체에 맞서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3년 전,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앓아누운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서였다. 처음엔 그저 감기라 여겼는데, 열이 내리지 않았고, 어느 순간 일어나지 못했다. 죽기 전 남긴 마지막 유언이 있었다. "서연아, 귀족 여성으로 살아가려면 바보여야 해. 똑똑함을 드러내는 순간, 너는 나처럼 버려질 거야." 마른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하신 말씀이었다.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바보처럼 살라는 게 무슨 뜻인지, 그게 왜 나를 지키는 방법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지금은, 너무 잘 이해가 됐다. 서재에서 아버지가 나를 도구로 취급했을 때, 나는 어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서연아, 넌 그저 하일국으로 가서 가만히 있으면 된다.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내 앞에 밀어 넣었다. 마치 물건을 넘기듯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정략의 도구, 국경 너머로 보낼 상품일 뿐이었다. 지성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큰 위험으로 끌고 갈 뿐이었다. 하일국. 은강 자작. 적국의 귀족 남편 앞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똑똑한 모습을 보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로 판단되어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감금, 심문, 혹은 그보다 더 나쁜 일들. 나는 편지를 손에 쥔 채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종이가 손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평화롭고, 이질적인 소리였다. 저 새는 저렇게 마음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나는 왜 이 좁은 방 안에서 벗어날 궁리조차 마음대로 못 하는 걸까. 결심이 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으로 나는, 아름답고 무지한 여자로 살아갈 것이다. 정치도, 경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저 얼굴만 예쁜 인형처럼. 그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19년 동안 감정을 숨기는 법은 이미 충분히 배웠으니까. 똑똑한 척하지 않는 것쯤, 그거야 어려울 것도 없다. 이미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다음 날, 별채로 박덕수 집사장이 찾아왔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늘 그랬듯이. "아가씨,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노년의 집사는 나에게 몇 안 되는 우호적인 존재였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도, 항상 나를 챙겨주었던 사람. 주름진 손으로 늘 내 방 앞에 조용히 먹을 것을 놓고 가시던 분. "덕수 할아버지, 저 정말 가야 하나요."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가씨,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기회요?"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이 저택을 벗어날 기회 말입니다." 덕수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었다. 이 저택, 이 별채, 이 모든 억압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 정략결혼이었다. 19년을 이 좁은 담장 안에서 살았다. 아버지의 눈치, 새어머니의 냉대, 이복형제들의 무시. 그 모든 걸 벗어난다는 게 어떤 느낌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적국이라는 두려움과, 자유라는 설렘이 동시에 밀려왔다. "제 손녀를 아가씨와 함께 보내려 합니다. 하일국까지 동행할 하녀로요." "손녀요?" "오하린이라는 아이입니다. 침녀 일을 아주 잘하지요. 본래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제가 부탁을 좀 했습니다." 집사장의 목소리에는 미안함과 기대가 섞여 있었다. "제가 아가씨를 끝까지 모시지 못하니, 그 아이라도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 이름을 마음속에 새겼다. 오하린. 낯선 나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어떤 아이일까.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처럼 겁이 많을까, 아니면 나보다 훨씬 대담할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만나보면 알 일을 왜 이렇게 미리 걱정하는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유언을 되새기고 있었다.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 오하린에게조차,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가까이 두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짐을 싸던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잠을 설쳤다. 옷가지 몇 벌, 어머니의 유품이 담긴 작은 상자, 그리고 몇 권의 책. 챙길 수 있는 짐이라 해봐야 보잘것없었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방 안의 물건들이 하나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방도, 이 저택도,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 바보 행세를 하며 살아가야 할 낯선 나라, 낯선 남자, 낯선 삶. 그 모든 것이 내일 아침이면 시작될 것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