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과회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해가 아직 중천에도 못 미쳤으니, 서둘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마음은 벌써 다과회장에 가 있었다.
설령은 자기가 그냥 화분 속 약초가 아니라고 했다. 정확히 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된다"는 말만 반복했는데, 그건 어쩐지 이 세계 모든 신비한 존재들의 공통 화법인 것 같아서 헛웃음이 났다. 무슨 비밀 결사라도 있는 건가. 신비한 존재 협회, 화법 통일 지침 제1조: 절대 명확히 대답하지 말 것.
"그럼 최소한 이것만 알려줘." 나는 화분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물었다. "세자 저하가 언제 위험해지는데?"
"오늘 다과회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완성되는 건 며칠 뒤다. 서서히 몸을 갉아먹는 종류의 것이니까."
서서히 갉아먹는다. 최음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회귀 전 재판에서 흘려들었던 말들이 이제야 앞뒤가 맞기 시작했다. 세자가 갑자기 몸이 상해서 쓰러졌고, 그 원인으로 내가 지목됐었다. 정확히는 내 방에서 발견된 독초 가루가 결정적 증거였다.
그때 나는 억울하다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판관은 내 말을 끊었고, 증인이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중 누구도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정해진 결론에 맞춰 입을 맞췄을 뿐.
누가 심어놓았는지는 뻔했다.
"고마워." 나는 화분에게 진심으로 인사했다. 화분이 무슨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곤 몸단장을 서둘렀다.
시녀가 가져온 옷 중에서 가장 밝은 색을 골랐다. 회귀 전엔 늘 어두운 색으로 존재감을 죽이려 애썼는데, 이번엔 반대로 가볼 참이었다. 눈에 띄어야 했다. 강윤재의 눈에.
오늘, 강윤재를 만난다.
회귀 전 강윤재는 내게 늘 무뚝뚝했다. 세자의 근위무사라는 신분에 어울리게 항상 곧은 자세로, 감정 없는 얼굴로 나를 대했다. 약혼자라는 이름만 붙어 있을 뿐, 그와 나 사이엔 그 어떤 온기도 없었다.
혼담이 오갈 때도 그는 딱 한 마디만 했다. "가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마치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 뒤로 몇 년을 약혼자로 지냈지만, 우리 사이엔 대화라 할 만한 것도 거의 없었다. 명절 인사, 의례적인 안부. 그게 전부였다.
처형 전날 밤, 그가 지하 감옥에 찾아왔었다.
차가운 돌벽, 곰팡이 냄새,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온 그의 발소리. 나는 그날의 발소리까지 기억한다. 규칙적이고, 흔들림 없는.
"빨리 죽는 게 낫다." 그가 말했다.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는지, 그냥 사실을 전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고통 없이 갈 수 있게, 내가 손을 좀 써놨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헛웃음이었다. 고작 그거였다. 사랑하지도 않는 약혼녀에게, 죽기 전에 해줄 수 있는 최선이 고통 없는 죽음이라니.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직도 선명하다. 아, 이 사람에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 확인이 오히려 편안했다. 더 바랄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다르게 해볼 참이었다.
다과회 자리에 그가 세자를 호위하러 나와 있었다.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허리에 찬 채 정원 한쪽에 서 있었다. 나를 흘긋 보고는 짧게 고개만 숙였다. 그 인사조차 형식적이라는 게 느껴졌다.
"강 도령님."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인사했다. 회귀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로. "오늘 날이 좋네요. 다과회에 좋은 날씨죠."
그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렇군요."
짧은 대답. 눈빛에 경계심이 스치는 게 보였다. 왜 저래, 갑자기 웬 살가운 소리냐는 표정.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회귀 전의 나였다면 이쯤에서 물러났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아, 근위무사님이라 자리를 못 뜨시나요?"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임무 중입니다." 그의 답은 단호했다.
"그럼 저하 곁을 지켜야 하시겠네요." 나는 슬쩍 본론으로 다가갔다. "저하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요즘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신다는 말을 들어서."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짧게. 하지만 분명히. 손끝이 검자루를 살짝 쥐었다가 풀리는 것까지, 나는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이 영애가 어찌 저하 안색까지 신경 쓰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함부로 그런 말씀 하시면."
조심하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이런 식이었을까. 내가 뭔가를 알아챌 때마다, 저 사람은 저런 눈빛으로 나를 막았을까.
"그냥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나는 순종적인 미소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하의 건강 이야기에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저 의아해했을 텐데, 저건 명백히 방어였다.
"영애답지 않은 관심이시군요." 그가 덧붙였다. 마치 나를 시험하듯.
영애답지 않다고. 회귀 전의 나는 어땠길래 그런 말이 나오는 걸까. 순종적이고, 조용하고, 누구의 안색 따위엔 관심도 없는 존재였을까. 그래, 아마 그랬을 거다. 그리고 그 조용함이 결국 나를 처형대까지 데려갔다.
"사람이 좀 걱정할 수도 있죠." 나는 웃음기를 담아 대꾸했다. "약혼자 사이인데 그 정도는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요?"
그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뻣뻣한 어깨선에서부터 드러났다.
강윤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 이서인이 서 있었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살랑이며 세자에게 다가가 웃고 있는 이서인.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그녀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손짓, 몸짓, 하나하나가 계산된 듯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이서인을 바라보는 강윤재의 눈빛.
나는 그 눈빛을 똑똑히 봤다.
무뚝뚝했던 그 얼굴에, 처음으로 다른 표정이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봤다. 눈가가 살짝 풀리고, 입매가 미세하게 부드러워지는 그 변화.
그건 나를 볼 때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예상은 했지만, 직접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회귀 전에 내가 왜 그렇게 외로웠는지, 지금 이 순간 확실히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