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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눈을 뜨면 늘 같은 천장이었다. 금 간 석고 몰딩, 색이 빠진 벽지, 그리고 창틀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는 손톱만 한 초록빛 정령. '오늘도 출근 도장 찍으러 왔냐.' 정령은 대답 대신 날개를 팔락였다. 말은 못 해도 눈치는 기막히게 빠른 녀석이었다. 이 녀석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창틀에 나타나서 내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엔 신기했는데 이제는 그냥 알람 시계 같았다. 배터리도 안 갈고 밥값도 안 드는 알람 시계. 나는 백서아, 청조국 백선 남작가의 영애다. 열여섯 살, 초록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난 소위 '초록의 숙녀'. 이 나라 법에 따르면 초록의 숙녀는 태어날 때부터 정령을 돌보는 임무를 지고, 그 대신 다른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 정령을 곁에 두고 매일 마나를 나눠주고, 정령이 원하는 걸 챙겨주는 게 유일한 '의무'였다. 겉보기엔 별거 없어 보이지만, 이게 하루 이십사 시간 대기조라는 걸 알면 다들 생각이 달라질 거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신성한 혈통이라며 떠받들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거 그냥 국가가 정한 무급 노동 아닌가. '복지도 없는 강제 노역이잖아, 이거.' 퇴직금도 없고, 연차도 없고, 심지어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낼 수도 없다. 초록의 숙녀는 정령이 떠나기 전까지, 혹은 죽기 전까지 이 자리에 묶여 있어야 한다. 전생에 파견직으로 온갖 회사를 떠돌며 배운 게 있다면, 명분 좋은 일일수록 대가는 후지다는 거였다. '숙녀'라는 이름에 낚여서 이 짓을 계속하다니, 나도 참 어지간히 순진했지. 전생의 나는 한국에서 계약이 끝날 때마다 다른 회사로 옮겨 다니던 파견직 사원이었다. 사수 없는 팀에 던져져서 매뉴얼도 없이 일 배우고, 계약 만료 두 달 전부터 다음 자리를 알아보는 게 일상이었다. 이력서에 적을 경력은 늘어나는데 통장 잔고는 늘 그 자리였다. 명절 상여금이라는 말은 사전에나 존재하는 단어였고, 정규직 전환이라는 말은 신기루였다. 그런 인생을 살다가 죽었는데 눈을 떠 보니 초록 머리 귀족 영애였다. 억울하다면 억울하고, 운이 좋다면 좋은 일이었는데— 요즘 들어 그 운이 다 되어가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창밖으로 마당을 내려다보니 정원사 없는 정원엔 잡초가 무성했다. 예전엔 저 자리에 장미 넝쿨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잡초밭이다. 정원사를 자른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원래 백선가는 크지 않아도 단단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삼 년 전부터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하인 수가 줄었고, 벽지가 낡아도 새로 바르지 않았고, 저녁 식탁에 고기가 올라오는 날이 줄었다. 예전엔 하인이 열이 넘었는데 지금은 다섯도 안 된다.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 월급이 밀리는 눈치였다. '망해가는 티가 아주 조곤조곤 나는구나.' 삼촌—아니, 오빠라고 부르는 게 익숙하다. 백준서, 나보다 여덟 살 많은 백선가의 당주.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열여덟 살이던 그가 가문을 이어받았고, 그때부터 나를 키웠다. 원래는 삼촌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오빠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게 됐다. 나이 차가 많이 나긴 해도 오빠라는 호칭이 더 편했다. 착하고, 사람을 잘 믿고, 그래서 위험한 사람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도련님이 가문을 물려받았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용해먹으려 들었을지 상상이 갔다. 최근 반년 사이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았다. 눈 밑이 거뭇해지고, 웃는 횟수가 줄고, 밤늦게까지 서재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 늘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준서 오빠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수프를 뜨는 숟가락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원래 이 시간엔 오빠가 오늘 하루 일정을 얘기해주거나, 별 것 아닌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오늘은 조용했다. "오빠, 요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거짓말할 땐 눈을 세 번 깜빡이는 거, 그거 여덟 살 때부터 그대로네.' 정확히 세 번이었다. 하나, 둘, 셋. 이 사람은 도박판에 앉으면 백전백패할 얼굴이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빤히 봤다. "형수님 요즘 안 보이시던데." "…투자할 곳이 있다고, 잠깐 지방에." 말끝이 흐려졌다. 목소리가 살짝 낮아지고, 시선이 접시로 떨어졌다. 저건 확실히 뭔가 숨기고 있는 표정이다. "언제 오시는데?" "곧… 곧 올 거야." '곧이 언제인데? 오빠도 모르는구나, 그거.' 형수, 즉 준서 오빠의 아내는 반년 전 혼인한 여자였다. 좋은 집안 출신이라며 소개받았고, 상냥하고 말도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인사 나눴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오빠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웃는 낯이 참 예쁘고, 말투도 조심스러웠고, 오빠를 대하는 태도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창가에 앉은 정령이 그녀만 보면 유난히 날개를 접고 몸을 웅크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인이 오든, 상인이 방문하든, 정령은 그저 무심하게 날개를 팔락일 뿐이었다. 그런데 형수만 오면 몸을 최대한 작게 만들며 창틀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정령은 사람의 선악을 판단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위험한 것 앞에서는 확실히 몸을 사린다. '저 여자, 뭔가 있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서재로 향했다. 요즘 들어 몰래 훑어보는 습관이 생긴 곳이었다. 원래는 오빠 허락 없이 들어가면 안 되는 방이었는데, 요즘은 오빠가 워낙 외출이 많아서 몰래 들어갈 틈이 생겼다. '이건 도둑질이 아니라 가문을 지키기 위한 정보 수집이다.' 이런 식으로 나름의 명분을 붙였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 그 위에 아무렇게나 얹힌 청구서 몇 장.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다가 손이 멈췄다. 청구서 아래 깔려 있던 서류 한 장이 눈에 걸렸다. '투자'라는 글자가 적힌 계약서 사본도 눈에 들어왔다. 도장은 이미 찍혀 있었다. 숫자를 확인한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금액이 백선가 일 년 수입의 세 배였다. 세 번을 다시 읽었다. 숫자가 바뀌지는 않았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 정도 금액이면 저택을 팔아도 못 갚을 액수였다. '이거… 오빠가 서명한 거 맞아?' 서명란에 적힌 필체는 낯설지 않았다. 오빠 필체가 맞았다. 언제, 왜, 누구랑 이런 계약을 한 건지 아무 설명도 없었다. 계약서 상단에 작게 적힌 상대측 이름을 확인하려는 순간, 창틀의 정령이 갑자기 요란하게 날개를 떨었다. 마치 무언가 온다는 걸 미리 알리듯이. 나는 서류를 손에 쥔 채 창가로 다가갔다. 정령이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창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 저택 정문 쪽으로 마차 몇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대가 아니었다. 세 대, 아니 네 대. 평소 손님이 올 때 쓰는 마차와는 확실히 달랐다. 장식도 없고, 칠도 벗겨진, 그저 사람을 실어 나르기 위한 용도로만 보이는 마차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유난히 거칠고, 표정은 더 거칠었다. 정문 쪽 하인이 뭐라고 말을 붙이려는 것 같았는데, 그들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곧장 저택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걸음걸이에 여유가 없었다. 뭔가를 받으러 온, 혹은 뭔가를 빼앗으러 온 사람들의 걸음이었다. '설마.' 마른침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손에 쥔 계약서를 다시 내려다봤다. 저 사람들과 이 서류가 무관하지 않다는 확신이, 이상하게도 아주 또렷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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