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문 앞에 늘어선 마차는 총 넷이었다.
검은 칠을 한 마차 네 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장례 행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는 정반대의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었지만.
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서류를 들고, 하나같이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건 딱 봐도 빚쟁이 표정이지.'
전생에도 파견 나갔던 회사가 부도날 때 딱 저런 낯빛의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컴퓨터부터 뽑아 가던 그날. 사람 얼굴에 저렇게 노골적으로 적의가 드러나는 건 돈 문제일 때뿐이다. 그리고 그 적의는 대개 옳다. 돈 안 갚은 쪽이 잘못이니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저택 안까지 쿵쿵 울렸다.
쿵. 쿵. 쿵.
문을 두드리는 리듬조차 성질이 나 있었다. 예의상 두세 번 두드리다 마는 게 아니라, 안에서 대답할 때까지 계속 칠 기세였다.
집사 할아버지가 허둥지둥 뛰어나가는 소리, 그 뒤를 따라 준서 오빠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난간에 몸을 붙이고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이럴 때 3층 계단 위라는 위치가 참 유용하다. 시야는 넓고 존재는 티가 안 나니까.
"백준서 남작 계십니까!"
한 남자가 목청을 높였다. 목소리가 저택 천장까지 쩌렁쩌렁 울려서, 하녀 몇 명이 놀란 얼굴로 복도 구석에서 서로 눈치를 봤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에는 낯익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아까 서재에서 본 그 계약서였다. 붉은 인장, 백선가의 문양. 틀림없었다.
'저거 진짜 저거네. 아까 그 계약서.'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 상황이라는 게 참 서글펐지만.
"이게 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준서 오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잠옷 위에 급하게 걸친 겉옷 매듭도 제대로 묶지 못한 채였다.
"그쪽 부인이 저희 상단에 투자금을 받아 갔습니다. 갚을 날짜가 지났고요."
"제 아내가요?"
"연락이 안 되니 여기로 온 거 아닙니까."
'형수, 이 여자, 결국 사고를 쳤구나.'
언제부터였을까. 서재에서 본 서류의 날짜를 떠올려 봤다. 벌써 몇 달 전 일이었다. 그 몇 달 동안 형수는 이 사실을 숨기고 웃으며 저녁 식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거다.
남자가 서류를 내밀었다. 준서 오빠가 그것을 받아 든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흔들렸다.
서류에 적힌 금액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안색이 종이처럼 새하얘졌다.
숨소리마저 멈춘 것 같았다.
"이, 이건 제 서명이 아닙니다."
"명의는 백선 남작가로 되어 있고, 서명도 대리인 자격으로 처리됐습니다. 부인이 남작님 인장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요."
"제 인장은…… 서재 금고에……"
"금고 열쇠, 부인이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준서 오빠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대답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형수가 오빠 몰래 인장을 훔쳐 투자 사기에 끌려간 것인지, 혹은 처음부터 이 사기의 한통속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제 이 빚은 백선가 전체의 빚이 됐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끝났다, 이 집.'
머릿속으로 계산이 굴러갔다. 저택 시가, 남은 영지 규모, 하인들 월급,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빚의 액수. 어느 쪽으로 굴려도 답은 마이너스였다.
빚쟁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집사 할아버지가 몸으로 막아섰지만 소용없었다.
"물러서시죠, 지금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물러서긴 뭘 물러섭니까, 우리도 답 없으면 여기서 밤새고 갈 겁니다!"
한 남자가 거실로 들이닥쳐 가구를 뒤집었다. 유리 장식장이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쨍그랑!
하녀 한 명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저희도 먹고살아야 합니다! 돈 안 갖고 오면 집이라도 뜯어가야죠!"
남자는 벽에 걸린 그림까지 손으로 훑어보며 값을 가늠하는 눈치였다. 저 그림, 백선가 조상의 초상화였는데. 저 사람들 눈에는 그냥 캔버스와 나무 액자 값어치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준서 오빠는 무릎을 꿇고 사정하듯 말했다.
"제발, 시간을 좀 주십시오.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저 착한 게 문제야, 저 착한 게.'
귀족 당주가 평민 빚쟁이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나는 계단 위에서 숨죽이고 보고 있었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렸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생각이 스쳤다.
'이거 안 갚으면 나도 저 사람들한테 끌려가는 거 아닌가.'
그 생각을 하는 내가 좀 싫었지만,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이 집 식구니까. 오빠가 저렇게 무릎 꿇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 한구석은 벌써 도망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빚쟁이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서류를 착착 정리하며 말했다.
"일단은 봐드리는 겁니다. 원래 저희 상단 방침이 그런 게 아니라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원금 절반이라도 가져오시면 그때 다시 얘기하고요. 안 그러면……."
남자가 말을 끊고 저택 벽을 한 바퀴 훑어보았다.
"이 집이랑 남은 영지, 저희가 처분할 겁니다."
그날 저녁, 빚쟁이들은 일주일의 시한을 주고 물러갔다.
조건은 명확했다. 일주일 안에 원금의 절반이라도 가져오지 않으면 저택과 남은 영지까지 압류하겠다는 것.
마차 네 대가 마당을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참고 있던 숨인지도 몰랐다.
준서 오빠는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문 틈으로 보이는 그의 등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평소에는 등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냥 어깨를 축 늘어뜨린 청년일 뿐이었다.
집사 할아버지가 저녁 식사를 가져다줬지만, 문 앞에 놓인 쟁반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그대로였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창틀에 앉은 정령을 바라봤다.
정령은 여전히 몸을 웅크린 채 날개를 접고 있었다. 창밖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몸이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였다.
'너는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미리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말 못 하는 걸 탓하는 것도 우습지만, 지금은 뭐라도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정령이 대답 대신 날개를 살짝 파닥였다. 위로인지 그냥 몸이 근질거려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법으로 정해진 초록의 숙녀는 정령을 돌보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을 해선 안 된다.
왕국법이 그렇게 정해놓은 이유는 뻔했다. 정령을 가진 귀족 영애가 밖에서 험한 일을 하다가 다치거나 죽으면, 그 나라의 정령 자원이 사라지는 셈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집에 필요한 건 정령을 돌보는 손이 아니라 돈을 벌어오는 손이었다.
법이 나를 지켜주는 건지, 이 집을 굶어 죽게 만드는 건지 헷갈렸다.
나는 창밖의 밤하늘을 오래 쳐다봤다.
별이 유독 많이 보이는 밤이었다. 전생에는 이런 밤하늘 본 적이 없었는데. 도시 불빛에 가려서였는지, 아니면 그때는 밤하늘 볼 여유조차 없어서였는지.
'법이고 혈통이고 나발이고, 일단 집이 넘어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숙녀고 영애고, 집이 없으면 다 껍데기 소리였다. 전생에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돈 없으면 명예도 자존심도 다 우습게 짓밟힌다는 거였다.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초록의 숙녀라는 신분을 숨기고, 어떻게든 이 집의 빚을 갚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문제는—열여섯 살, 신분을 밝힐 수 없는 귀족 영애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글을 팔까? 그림을 그려서 팔까? 아니면 정령의 힘을 몰래 이용해서라도?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뭔가 하나도 그림이 안 잡혔다. 열여섯짜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이 세계에서는 더더욱.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이 뻑뻑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때,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자니?"
준서 오빠였다.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이불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서재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던 사람답게, 그의 얼굴은 초췌하고 눈 밑은 시커멨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는데, 방 안 등불 아래서 보니 낯선 병 하나였다.
"이게 뭐예요?"
내가 물었다.
오빠는 대답 대신 병을 내 손에 쥐여줬다.
차갑고 낡은 유리병이었다. 안에는 진한 색의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염색약이야."
"…염색약이요?"
"네 머리색, 이 나라에서는 좀 눈에 띄잖아."
그의 손에 든 것은, 낯선 염색약 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