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을 뜨자 형광등 불빛이 쏟아졌다.
낯설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나는 불타는 하늘 아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검은 창이 가슴을 뚫고 지나가던 그 순간의 통증이 아직도 생생했다.
살이 타는 냄새, 피가 끓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까지.
'죽은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삼십여 개의 책상이 줄지어 있었고, 창밖으로는 벚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교실.
분명 교실이었다.
'이게 뭐지.'
책상 위에는 낡은 필통과 펼쳐진 노트가 있었고, 노트 귀퉁이에는 낙서처럼 그려진 별 모양이 몇 개 남아 있었다.
이 몸의 주인은 수업 시간에 딴짓을 자주 했던 모양이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려는데 손끝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차갑고, 저릿하고, 살짝 타는 듯한 감촉.
마력의 잔재라는 걸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마계에서 십 년을 넘게 다뤄온 힘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끝에 힘을 주어보았다.
작은 스파크 같은 것이 손톱 밑에서 일었다가 사라졌다.
'환상이 아니야.'
그런데 손끝만이 아니었다.
이마 양쪽, 관자놀이 위쪽에서 뭔가가 만져졌다.
작고 단단한, 손톱만 한 돌기 두 개.
'설마.'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나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교실은 비어 있었다.
책상 사이를 지나 창가로 다가가며 나는 내 팔과 다리를 훑어보았다.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가늘고 흰, 십대 소녀의 다리였다.
손등에는 굳은살 하나 없었고, 손톱은 짧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장에서 검을 쥐던 손이 아니었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이하은, 또 여기 있었니?"
담임의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렸다.
'이하은. 그게 내 이름인가.'
생소하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입안에서 굴려보니 낯설지 않게 발음이 나왔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과 머릿속의 기억이 어긋나 있었다.
분명 나는 마계에서 무언가를 지키려 했고, 누군가에게 배신당했다.
그 원한의 열기가 아직 가슴 한복판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은 열일곱 살, 은성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의 것이었다.
담임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에는 반쯤 흐트러진 파마머리, 목에는 목걸이형 사원증, 발에는 낡은 슬리퍼.
이 학교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 특유의 지친 기색이 얼굴에 배어 있었다.
"수업 시간에 혼자 조퇴하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조퇴.
그런 단어가 낯설게 들렸다.
'이 몸의 주인은 원래도 이런 일을 자주 벌였나 보군.'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괜히 나섰다가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몸의 주인이 하던 대로 맞춰주는 게 낫다.
"머리가 아파서요."
최대한 얌전하게 대답했지만 담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또 그 소리. 마계니 뭐니 하는 이야기, 애들이 다 안다더라."
마계.
그 한마디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그걸 말한 적이 있었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 몸의 기억과 내 기억이 반쪽씩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어렴풋이, 이 몸의 주인이 노트에 마계에 대한 이야기를 끄적이며 친구들에게 떠들었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애들 사이에서 이상한 애로 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분명한 건 하나였다.
마계에서 겪은 일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 몸에 남은 마력의 잔재가 그 증거라는 것.
담임이 손을 뻗어 내 이마 쪽 머리카락을 넘기려 했다.
손끝이 이마에 닿기 직전, 나는 재빨리 몸을 틀었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괜찮아요, 그냥 두통이에요."
담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다 한숨을 쉬었다.
교복 매듭이 흐트러진 것, 앞머리가 유난히 길게 내려온 것,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까지 하나하나 체크하는 눈치였다.
이 담임, 생각보다 관찰력이 나쁘지 않다.
"양호실 가서 쉬어. 오늘은 조퇴 처리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담임은 등을 돌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 뿔을 아무도 보면 안 된다.'
만약 누군가 이걸 본다면, 그 다음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마계에서든 이곳에서든, 이질적인 존재는 결국 배척당하거나 이용당한다.
배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나로서는, 그 어느 쪽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양호실로 향하는 복도는 조용했다.
수업 중인 교실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벽을 타고 흘러나왔다.
발밑에서 실내화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십칠 년을 이 몸으로 살아왔을 텐데도, 나에게는 모든 게 처음 걷는 길 같았다.
화장실 표지판이 보이자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면대 앞, 거울 앞에 멈춰 섰다.
거울 속에는 낯선 얼굴이 있었다.
동그란 눈, 갈색이 섞인 단발머리, 마른 어깨.
이하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었다.
조심스럽게 앞머리를 걷어 올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검은 뿔 두 개가, 손톱만 한 크기로 이마 양쪽에서 솟아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거울 속 소녀의 눈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손으로 눌러보니 단단했고, 힘을 주자 뿌리 쪽에서 미묘한 통증이 올라왔다.
살아 있는 것처럼, 뼈처럼, 그렇게 몸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절대로 인간의 몸에 있어선 안 될 것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눈동자가 순간 붉게 빛났다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히 앞머리를 내리고 화장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부터, 이 뿔을 감추고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