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계귀환 금단연가

2화

"이하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양호실 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여자. 손목엔 얇은 시계, 어깨에는 참고서가 잔뜩 든 백팩.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이군.' 손끝의 굳은살, 눈 밑의 다크서클, 걸음걸이의 조급함까지, 모든 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한 발짝 더 다가가서 살폈다. 백팩 옆구리에 삐죽 튀어나온 것은 수학 문제집이었고, 표지는 이미 여러 번 접혔다 펴진 흔적으로 닳아 있었다. 손목시계는 값비싼 것이 아니었으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걸 보니, 시간을 재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인 듯했다. '하루를 초 단위로 쪼개서 쓰는 사람이다.' 여유 따위는 사치인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언니." 입에서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서은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 언니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손끝과 심장은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 몸에 새겨진 기억이 반응하는 건가.' 의식과 육체가 따로 노는 이 기묘한 감각에, 나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서은은 팔짱을 낀 채 나를 훑어보았다. 그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마치 신체검사를 하듯 꼼꼼했다. "또 마계 얘기 했다며." "그런 적 없어요." "학교에서 전화 왔어. 애들이 다 들었대."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 몸의 주인은 대체 뭘 얼마나 떠들고 다녔던 거지.' 마계, 뿔, 그런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고 다녔다면,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진짜로 마계를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그저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걸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지금 나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서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집에 가자." 그 손이 뜨거웠다. 마계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는, 그 온도가 이상하게 낯설고 또 그리웠다. 손아귀의 힘도 상당했다. 억지로 끌려가는 형국이었지만, 이상하게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온기,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 같다.' 교문을 나서는 동안 나는 서은의 옆얼굴을 곁눈질로 살폈다. 미간에 잡힌 주름, 굳게 다문 입술. '이 사람도 지쳐 있다.' 입시와 동생, 두 가지를 동시에 짊어진 얼굴이었다. 걸음걸이는 빨랐지만 흔들림이 없었고, 그 안정감 속에 피로가 켜켜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가방끈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하겠군.' 동생 문제로 학교에서 전화를 받고, 하던 공부를 접어두고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 상황을 상상하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서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서은은 창밖만 보고 있었다. 창에 비친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동자만은 쉴 새 없이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 움직였다. '입시 일정과 내 문제를 동시에 셈하고 있나.' 나는 그 틈을 타서 손끝의 감각을 다시 시험해보았다. 작게, 아주 작게 마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손끝에서 미열이 피어올랐다. '감정이랑 연동되는 건가.' 방금 서은을 보며 느낀 불안, 애틋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두근거림. 그 순간의 감정이 마력을 자극한 것 같았다. 시험 삼아 이번에는 조금 다른 감정을 떠올려 보았다. 마계에서 마지막으로 느꼈던 배신감, 그리고 분노. 그러자 손끝의 열기가 순식간에 커졌다. '역시. 감정의 강도에 비례해서 마력이 반응한다.' 이건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 세계에서 이 몸으로 살아가려면, 감정을 다스리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얼른 손을 주먹 쥐고 감정을 눌러 삼켰다. 버스 손잡이를 쥔 손등에 핏줄이 살짝 도드라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앞으로는 항상 조심해야겠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서은의 어깨가 내 어깨에 살짝 부딪혔다. 그 잠깐의 접촉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집에 도착하자 부모님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이마를 짚었다. "또 사고 쳤다며." "사고 아니에요." "이하은, 너 요즘 왜 이래. 중2 때도 이러더니." 중2.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물음표를 찍었다. '그때도 이런 증상이 있었나.' 엄마의 말투에는 걱정보다 지긋지긋함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 몸의 주인은 오래전부터 뭔가 이상 증세를 보였던 모양이다.' 그게 마계와 연결된 증상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사춘기의 방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부모님의 시선에 이미 피로가 짙게 배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문제아로 규정하고 있었고, 그 시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정된 듯했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리모컨을 만지작거렸다.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텔레비전 소리만 거실을 채우고 있었고, 아빠의 시선은 화면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집에서 나를 진짜로 걱정하는 사람은 한 명뿐인가.' 서은만이 내 앞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머리에 뭐 났다며, 애들이 뿔이라고 하던데." 순간 온몸이 굳었다. '들켰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앞머리를 넘겼다. 뿔은 감춰져 있었다. 지금은 감정이 가라앉아 있어서인지 작아진 채였다. '다행이다. 방금 마력을 억누른 게 맞아떨어졌군.'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서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이마를 살폈다. 그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제발 못 봐라.' 나는 숨을 죽였다. 혹시라도 지금 감정이 흔들려서 뿔이 다시 자라난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머릿속으로 아무 감정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무념무상. 숫자를 세는 것처럼 마음을 텅 비워 보았다. 다행히 서은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거뒀다. "됐어. 저녁 먹고 방에 들어가 있어. 오늘부터 다시 학원 스케줄대로 움직일 거니까." 그 말이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학원, 스케줄, 그런 단어들이 이 세계에서 나를 옭아맬 새로운 족쇄처럼 느껴졌다. '마계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전투도, 마력 수련도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이라는 이름의 굴레. 그것이 지금 내게는 가장 낯선 전장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오르며 나는 생각했다. '이 몸으로, 이 신분으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그 뿔의 비밀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마계에서 인간계로, 낯선 이름과 낯선 가족, 그리고 낯선 몸까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데, 세상은 그런 걸 봐주지 않는군.' 그런데 방문을 닫는 순간, 서은의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들려왔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이야. 각오해." 그 말투가 이상하게 서늘했다. 문고리를 잡은 손끝이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각오하라니, 대체 뭘.' 단순한 학원 스케줄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목소리에 담긴 뉘앙스가 너무 무거웠다.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이 집 안에 이미 도사리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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