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번 생엔 도망치겠습니다

5화

다섯 살 생일을 두 달 앞두고, 나는 처음으로 저택 밖으로 나가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물론 계획이라고 해봐야 대단한 건 아니었다. 박현우가 정기 왕진을 핑계로 나를 마을 진료소까지 데려가고, 그 사이 다혜가 저택에 남아 부모의 눈을 가리는 식이었는데, 세 사람이 짜기엔 지나치게 소박한 계획이라 오히려 성공할 것 같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거대한 탈출 작전이 아니라 병원 나들이라니, 이건 뭐 반차 쓰고 몰래 딴짓하는 수준인데.' 마차에 오르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손끝은 저절로 옷자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마차 문이 닫히고 바퀴가 자갈길 위를 구르기 시작하자, 나는 창문 커튼 사이로 눈을 붙이고 바깥 풍경을 훔쳐봤다. 저택 안에서만 다섯 해를 살아온 아이의 시선으로 보자면, 왕도의 거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세계였다. 좌판을 벌인 상인들이 목청을 높이고, 아이들이 골목 사이를 뛰어다니고, 마부들이 서로에게 욕설인지 인사인지 모를 말을 던지는 풍경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런 걸 보고 있으면 내가 무슨 갇혀 있던 공주님 같잖아.' 실소가 나왔지만, 사실 그 말이 정확히 내 처지였다는 게 더 웃겼다. 나는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앞으로 도망칠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큰길은 검문이 많을 테니 상단 마차들이 다니는 뒷길을 이용해야 할 것이고, 국경까지는 최소 며칠, 그 사이 묵을 곳과 신분을 감출 방법도 필요했다. 손가락으로 마차 벽에 보이지 않는 지도를 그리듯 선을 그어가며 계산하는데, 다혜가 그 손끝을 슬쩍 잡았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아가씨. 지금은 발판을 만드는 시기예요." 그 말에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발판이라는 표현이 마치 신입사원 연수 기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인턴 기간이라고 생각하자. 정규직 전환까지는 참는 거야.' 다혜는 내 표정을 보고는 뭐가 그렇게 웃기냐는 듯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게 만들지 않는. "국경까지 며칠이나 걸릴까요, 다혜." "지금 그걸 왜 물으세요. 아직 다섯 살도 안 됐는데." "다섯 살이든 서른 살이든 도망갈 땐 도망가야죠." 다혜는 대답 대신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손길이 다정했다. 나는 그 손길에 몸을 살짝 기울이며 창밖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진료소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낡은 이층 건물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와 마른 약초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박현우는 나를 진찰용 의자에 앉히고 익숙한 손길로 청진기를 대는 척했다. 그 사이 조수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문 앞에서 망을 보고 있었는데, 아마 박현우가 미리 심어둔 사람인 듯했다. '이 남자, 준비성이 은근히 철저하네.' 나는 그의 손이 내 옷깃 안쪽으로 슬쩍 서류 몇 장을 밀어 넣는 걸 느끼며 숨을 죽였다. "당장 쓸 건 아니지만, 준비는 미리 해두는 게 좋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서류를 살짝 펼쳐봤다. 낯선 이름, 낯선 신분, 그리고 그 아래 상단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상단 쪽 인맥을 통해 마련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인맥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그도 자세히 말하지 않았고 나도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일은 알면 알수록 무거워지는 종류의 비밀이었으니까. "이런 걸 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쉽지 않았죠. 근데 뭐, 어차피 제 목은 이미 반쯤 걸어놓은 셈이니까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던지는 그를 보며, 나는 이 남자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이미 이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다는 걸 실감했다. 그 무게가 미안하면서도 고마워서, 나는 그의 손을 꽉 붙잡으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손이 작아서 그의 손 절반도 감싸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온전히 전하고 싶었다. "고마워요. 진심으로." "고맙긴요. 저도 나중에 목숨 값 청구할 겁니다, 아가씨."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다혜는 그런 우리를 보며 옅게 웃었고, 그 웃음 안에는 안도와 걱정이 반씩 섞여 있었다. 진료소를 나서기 전, 박현우는 형식적으로 내 맥을 짚으며 큰 소리로 "경과가 양호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마차 밖에서 대기하던 저택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 뻔한 연극이 웃겨서 나는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뒤 며칠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부모는 여전히 무심했고, 나는 여전히 조용한 아이인 척 지냈으며, 다혜와 박현우가 만들어준 작은 안전망 안에서 처음으로 이 삶에 여유라는 감정을 느꼈다. 유모는 여전히 나를 인형 다루듯 무표정하게 대했고, 하녀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일 뿐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모든 무관심 속에서 다혜만이 유일하게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존재였다. 정원에서 다혜와 나란히 앉아 볕을 쬐던 어느 오후, 나는 잔디 위로 떨어지는 햇살의 온도를 손끝으로 느끼며 이 평화가 얼마나 갈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다혜는 내 옆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문득 실을 끊으며 말했다. "아가씨, 요즘은 표정이 좀 편해지신 것 같아요." "그래요? 다혜 덕분이겠죠." "저 말고도, 아가씨 스스로 노력을 많이 하시니까요." 그 말이 새삼스레 마음에 걸려서, 나는 잔디를 손끝으로 뜯으며 대답을 미뤘다. 노력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거울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반년이었다.' 그렇게 안심하던 것도 딱 그 순간까지였다. 저녁 무렵 아버지 이도현이 갑작스레 나를 서재로 불렀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왕실의 인장이 찍힌 서한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걸 느꼈다. 붉은 봉인 위로 찍힌 문양이 촛불 아래서 유독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얼굴에 옅은 흥분과 긴장을 함께 띄운 채 말했다. "왕실에서 정식으로 너와 왕태자 전하의 약혼을 공표하는 절차를 서두르라는 전언이 왔다." 그 한마디에 나는 지금까지 세워온 모든 계획이 순식간에 시간을 다투는 문제로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발판을 다지고 있을 여유는 이제 없었다. 서한을 쥔 아버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두려움인지 기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딸의 목숨보다 가문의 명예가 우선인 남자에게, 왕실의 서한은 축복이자 도박이었을 테니까. "언제부터입니까." 내 목소리가 낯설게 갈라져서 나온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서한을 다시 접으며 짧게 대답했다. "자세한 절차는 곧 통보가 올 것이다. 준비해라." 준비해라, 라는 그 짧은 명령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저 서한에 적힌 날짜가 얼마나 가까운지도 모른 채, 나는 그저 아버지의 표정 뒤에서 이 저택의 문이 조금씩 닫혀가는 소리를 들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나는 서재 문을 나서는 내내 다혜에게, 박현우에게 어떻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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