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거절 못하는 천재 약사

1화

등잔불이 다 타들어가고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시료병 서른두 개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코끝에 가져다 댔다. 장미수 특유의 텁텁한 단내가 훅 끼쳤다. '농도가 아직도 미묘하게 어긋난다.' 한서아가 원한 건 '봄바람처럼 가볍지만 오래 남는 잔향'이었다. 말은 예뻤지만 그걸 실제로 구현하는 건 결국 내 몫이었다. 시료병 하나에 히아신스 추출물을 세 방울, 다음 병에는 두 방울, 그다음엔 네 방울. 이런 식으로 배합을 조금씩 틀어가며 서른두 개의 변주를 만들어내야 했다. 창밖은 이미 캄캄했고, 궁정 약사방 건물 전체에 불이 켜진 곳은 내 자리뿐이었다. 동료들은 저녁이 되자 마차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혹은 야회로 흩어졌다. 문밖으로 마차 바퀴 소리가 멀어지던 게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남았다. 남은 게 아니라 남겨졌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한서아는 아침에 이렇게 말했다. "서윤아, 이 아이디어들 좀만 다듬어줄래? 나는 오후에 다른 회의가 있어서." 그녀의 목소리엔 미안함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투였다. 손에는 서너 줄짜리 메모지 한 장이 들려 있었는데, 그게 오늘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의 전부였다. 정우진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서윤 씨가 손이 워낙 빠르니까요. 저희가 방향만 잡으면 되죠." 그땐 그 말이 칭찬처럼 들렸다. '손이 빠르다.' 지금 이 밤, 그 말을 다시 곱씹으니 전혀 다른 뜻으로 들렸다. 손. 나는 손이었다. 생각하는 머리는 저쪽에 있고,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손은 여기에 있었다. 머리는 회의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손은 여기 남아 알코올 냄비 앞에서 밤을 새운다. 그렇게 나눠진 역할이 마치 원래부터 정해져 있던 것처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에 오래 남았다. '이상하다. 오늘 처음 이 사실을 깨달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프지.' 어쩌면 처음으로 정면에서 마주 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석 달 동안 한서아와 정우진이 낸 아이디어 회의록을 나는 몇 번이고 다시 훑어보았다. 회의록엔 그들의 이름이 굵게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조그맣게 '실행: 이서윤'이라는 한 줄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실행. 그 단어가 유독 눈에 밟혔다. 실행은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걸, 나는 궁정에 들어와서야 배웠다. 왕립약학원을 나온 사람들에게는 '발상'이 있었고, 나 같은 독학 출신에게는 '손'이 있었다. 그 구분이 누가 정한 건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회의록 맨 위에 붙은 도장, 서명란의 필체, 그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서는 한 번도 열려 있지 않았다. 손끝이 시렸다. 밤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시료병을 들었다. 장미수와 히아신스 추출물의 배합비를 조금 더 조정해야 했다. 유리 막대로 저을 때마다 병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생겼다가 가라앉았다. 일에는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나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하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유리 막대가 병 벽을 톡, 톡 두드리는 소리마저 오늘 밤엔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배신감이라니. 우스운 단어다.' 배신이라는 건 원래 신뢰가 있어야 성립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관계에 신뢰라는 걸 걸어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료들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나도 이 팀의 일원이라고 믿었다. 한서아가 내 이름을 부를 때의 그 다정한 억양, 정우진이 어깨를 툭 치며 건네던 농담. 그런 사소한 것들을 나는 우정이라 착각했던 걸까. 그 믿음이 오늘 밤 소리 없이 무너졌다. 무너지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저 등잔불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조용하고 서서히. 나는 병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에서 알코올과 허브 냄새가 났다. 이 냄새는 늘 나를 안심시켰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괜찮아. 이건 그냥 야근이야.'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이 오히려 더 공허하게 들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시료병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른두 개였던 것이 서른다섯 개, 서른일곱 개로 불어난 듯한 착시마저 들었다. 나는 몇 번이나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눈물이 나온 건 아니었다. 그저 눈이 시려서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등잔불 심지가 지지직 소리를 내며 잠깐 커졌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그 작은 흔들림조차 오늘은 유독 신경을 긁었다. 책상 한쪽에 쌓인 시료병들의 라벨을 다시 확인했다. 번호, 배합비, 시간. 내가 손으로 적어 넣은 글씨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규칙적이고 절도 있는 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쳤다. 옷매를 정돈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넘겼다. 이 시간에 이곳을 찾아올 사람이 몇이나 될까 헤아려보았지만, 답은 금세 나왔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궁정약사 선배, 송지안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허리를 곧게 세운 자세, 흐트러짐 없는 옷깃, 딱딱하게 굳은 표정까지. 용건이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걸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여기 있었네." 말투에 묘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동정인지 비웃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늘 그런 애매한 어조였다. "내일 아침까지 필요한 포션이 하나 더 생겼는데."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또 시작이다.' 시료병 서른두 개를 다 채우기도 전에, 또 다른 짐이 얹히는 셈이었다. 송지안의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이 등잔불 아래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저 종이 위에 또 누구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 조그맣게 '실행: 이서윤'이라는 한 줄이 붙어 있을지, 나는 이미 알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