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숲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흙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발밑을 뒤덮은 낙엽들은 밟을 때마다 축축한 소리를 냈으며, 저 멀리서부터 이어진 나무들의 그림자가 마치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처럼 시야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발밑의 흙이 떨리는 감각으로 먼저 알아차렸다.
쿵, 쿵, 쿵.
땅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뒤섞이며 그 존재의 크기를 짐작케 했다.
숲을 가르며 다가오는 것은 몸통이 검은 비늘로 덮인 거대한 짐승이었다.
흑린수(黑鱗獸)라 불리는 그것은 본디 깊은 산중에서만 서식하는 요수였는데, 어째서 이곳까지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지금 그것을 궁리할 여유는 없었다.
비늘 하나하나가 달빛조차 삼켜버릴 듯 검게 번들거렸고, 그 틈새로 흐르는 붉은 기운이 짐승의 존재감을 한층 더 짓누르는 듯했다.
콧김을 내쉴 때마다 허공에 하얀 김이 서렸고, 그 김 사이로 드러난 이빨은 사람 손목만큼이나 굵어 보였다.
짐승의 붉은 눈이 나를 향해 번뜩였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옆으로 피했으나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곧바로 나무 등에 등을 부딪히고 말았다.
- 쿠웅!
등판이 저릿하게 울렸고, 흑린수의 앞발이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짓이기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흙먼지 사이로 파고든 짐승의 발톱이 땅을 갈라놓았고, 그 갈라진 틈에서 뿌연 흙가루가 피어올랐다.
'죽는다.'
그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시야를 가득 채운 그 무수한 점들이 갑자기 하나의 흐름으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이 기이한 감각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무수한 입자들의 뭉치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그저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인 그 점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순식간에 맞춰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나는 짐승의 몸 전체를 이루는 입자들의 밀도가 목덜미 부근에서 유난히 옅어져 있다는 것을 보았다.
다른 부위는 촘촘하게 짜인 그물처럼 단단해 보였으나, 그 한 지점만이 마치 좀이 슬어 구멍이 난 옷감처럼 허술했다.
'저기다.'
생각과 동시에 나는 몸을 굴려 짐승의 옆구리 아래로 파고들었고, 손끝에 남아 있던 미약한 진기를 전부 끌어모아 그 옅어진 지점을 향해 내질렀다.
손끝이 짐승의 비늘에 닿는 순간 느껴진 것은 뜨거운 열기였고, 그 열기를 뚫고 진기가 스며드는 감각이 손목까지 저릿하게 전해졌다.
-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흑린수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고, 나는 그 반동에 튕겨나가 바위 옆에 나뒹굴었다.
바위에 부딪힌 어깨에서 둔중한 통증이 퍼져나갔으나, 그것을 살필 겨를조차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팔다리는 이미 힘이 다 빠져 있었는데, 그 순간 짐승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물러나시오!"
중년의 사내가 검을 든 채 짐승을 향해 몸을 날렸고, 검신에서 뿜어진 은은한 빛이 짐승의 눈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졌다.
사내의 신법은 날렵했고, 검을 다루는 손목의 움직임에는 오랜 세월 갈고닦은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짐승은 이미 부상을 입어 광기에 휩싸인 상태였고, 사내의 검격을 억지로 받아내며 앞발을 휘둘러 그를 튕겨냈다.
- 콰드득!
앞발에 밀려난 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고, 그대로 나무 밑동에 부딩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사내가 나무 밑동에 부딪혀 쓰러지는 것을 나는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고, 짐승은 이제 목표를 그에게로 돌린 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붉은 눈이 다시 한번 번뜩였고, 그 시선이 쓰러진 사내의 몸을 향해 고정되었다.
'저 사람이 죽는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계산할 겨를도 없이, 다리가 땅을 박차고 있었다.
나는 다시 눈앞의 그 어지러운 시야를 향해 몸을 던졌고, 이번엔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짐승의 약점을 찾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손에 잡히는 돌덩이를 움켜쥐고, 짐승의 아까 상처 입은 옆구리 그 자리를 향해 온몸으로 부딪혔다.
돌의 거친 표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그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신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막아야 한다.'
- 콰앙!!!
짐승이 다시 한번 괴성을 지르며 옆으로 넘어갔고, 그 반동으로 나 또한 몇 걸음 튕겨나가 바닥을 굴렀다.
구르는 몸을 따라 자갈과 흙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고, 입안에서는 씁쓸한 피 맛이 느껴졌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눈앞의 그 무수한 입자들이 흐릿해지며 하나둘 뭉개지듯 사라지고 있었고, 그 감각은 마치 누군가 눈앞에 물을 뿌려놓은 듯 뿌옜다.
'이대로 끝인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짐승의 몸을 이루던 입자들이 눈앞에서 서서히 흩어지듯 옅어지는 것이 보였고, 마침내 짐승은 커다란 몸을 뒤틀며 그대로 쓰러졌다.
- 쿠구웅!
땅이 크게 울렸고, 그 진동이 등을 타고 올라와 온몸에 남아있던 마지막 기력마저 앗아가는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 누운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사내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발소리가 낙엽을 밟으며 다가올 때마다,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괜찮으신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걸걸했으며,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상처에서는 검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 검은 피는 짐승의 독기에 물든 듯 탁하게 굳어가고 있었고, 사내의 얼굴 또한 이미 반쪽이나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만을 지어 보였고, 그것이 그날 내 의식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초옥의 침상 위에 누워 있었고, 천장에서는 마른 약초 다발들이 매달려 있는 채로 은은한 향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쑥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씁쓸한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고, 그 냄새를 따라 정신이 조금씩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창밖으로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그 빛이 방 안 가득한 먼지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어깨와 옆구리에서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고, 그 통증에 나는 나직한 숨을 내뱉으며 다시 몸을 눕혔다.
방 안은 조용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만이 이곳이 숲과 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드디어 일어났군."
곁에 앉아 있던 사내가 내게 눈길을 던지며 말했고, 나는 그가 어제 그 위기에서 함께 있었던 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의 얼굴에는 아직 어제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손목에는 하얀 천이 감겨 있었고, 그 천 위로 검은 핏자국이 옅게 배어 나온 흔적이 보였다.
그는 그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매만지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떤가? 그 짐승의 발톱이 자네를 스쳤을 때, 나는 이미 자네가 저세상으로 넘어간 줄로만 알았네."
"누구십니까?"
내가 조심스레 물었을 때,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문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유현담(柳玄潭)이라 하네. 그런데 그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자네는 대체 무슨 재주로 그 짐승의 약점을 정확히 짚어냈나?"
그의 눈빛은 여유로운 태도와는 달리 날카롭게 나를 훑고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궁금증을 묻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시선이었다.
"내 이십여 년을 검을 잡고 살아왔지만, 흑린수의 그 목덜미 한 치짜리 틈을 단번에 노려 찌른 자는 처음 보았네. 그건 웬만한 노강호(老江湖)조차 쉬이 알아채지 못하는 자리야."
그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시야에 대해, 나는 처음으로 다른 이 앞에서 입을 열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눈앞에서 세상이 무수한 점으로 흩어져 보인다고, 그 점들의 밀도로 사물의 약한 곳을 짚어낼 수 있다고,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늘어놓았다가는 필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마냥 침묵을 지킬 수도 없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내 대답을 기다리며 조금씩 좁아지고 있었고, 그 좁아지는 시선 속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는 듯 보였다.
목이 마르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입술을 축이려 했으나 침조차 제대로 삼켜지지 않았고, 나는 그 어색한 정적 속에서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손끝을 움찔거렸다.
"그, 그것이……"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으나, 그 뒤에 이어질 문장을 나조차 알지 못했다.
유현담은 그런 나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의심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였고,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한 채 그저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