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백세에 눈이 열렸다

5화

강선봉의 정상부에 자리한 유현담의 폐관실은 사시사철 서늘한 바위 냄새와 옅은 영기가 뒤섞인 공기로 가득했고, 그 틈새로 배어드는 습기는 마치 오래된 서책의 냄새와도 닮아 있었다. 벽면을 따라 새겨진 낡은 부적들은 세월에 색이 바랬지만, 그 위로 흐르는 미세한 기운만은 여전히 살아 숨 쉬듯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약재를 손질하며 그 안으로 들어섰다. 바구니 안에 담긴 약재들에서는 씁쓸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올라왔고, 손끝에 닿는 줄기의 질감은 사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익혀온 손놀림 그대로 낯익었다.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잎을 골라내고 뿌리를 다듬으며 폐관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사이 유현담의 얼굴에도 세월의 흔적이 뚜렷해졌지만,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예리했다. 흰 눈썹 아래로 깊게 자리한 눈동자는, 마치 지금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는 듯한 냉정함을 품고 있었다. "오늘 밤이 그 밤일세." 그는 손질된 약재를 받아 들며 나에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순간 손끝이 얼어붙는 감각을 느꼼과 동시에 그 말의 무게를 되짚어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그 안에는 오랜 세월 눌러 담아온 기대와 조바심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소원화(素願花) 말씀입니까." "그렇지. 예순 해 만에 다시 피어나는 꽃일세. 이 강선봉 정상부의 절벽 틈에서, 오늘 밤 홍월(紅月)이 뜨는 것과 함께 봉오리가 열릴 것이야."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지만, 서쪽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이상하게 붉은 기운이 서서히 번져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빛깔은 마치 누군가가 하늘의 끝자락에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옅은 주홍에서 짙은 홍색으로 서서히 번져가고 있었다. 입자안을 통해 바라본 대기의 흐름 역시, 이 며칠 사이 유난히 요동치고 있었다. 평소라면 잔잔하게 흐르던 산의 기운이, 오늘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숨을 몰아쉬듯 불규칙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 꽃이 맺는 열매의 종류는 그날의 기운에 따라 각기 다르다더군." 유현담은 낡은 서책의 한 페이지를 손끝으로 짚으며 그렇게 설명했고, 그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미묘한 긴장이 배어 있었다. 서책의 종이는 이미 누렇게 색이 바뀌어 있었고, 그 위로 그려진 그림들 역시 세월에 지워져 형체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주과(主果), 오도과(悟道果), 파망과(破網果), 환동과(還童果), 만수과(萬壽果)까지, 어느 것이 맺힐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지." "그것들 하나하나가 그토록 다른 효험을 지녔단 말입니까." 내가 묻자 유현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끝으로 서책의 여백에 무언가를 그리듯 짚어나갔다. "오도과는 깨달음의 벽을 허물어주고, 파망과는 얽매인 심마를 끊어내며, 환동과는 노쇠한 육신을 되돌린다 하지. 만수과는 그저 목숨을 늘려주는 데 그치지만, 그것마저도 결코 흔치 않은 영과일세. 하나 주과는 다르지." "주과는 어떤 것입니까." "주과가 맺힌다면, 이것으로 순원단(純元丹)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야.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삼십 년 가까이 기다려온 금단(金丹)의 마지막 관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유현담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삼십 년의 기다림이라는 말의 무게가, 그의 등을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좌관에 들어 앉아 있었는지, 나는 옆에서 지켜보아온 세월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관문 앞에서 무너지고, 몇 번이나 다시 일어서던 그의 뒷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동안 애써주었네, 도현." 그가 문득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말투에서 평소와는 다른 낯선 결을 느꼄다. 마치 미리 사죄를 구하는 듯한, 아니면 어떤 각오를 다지는 듯한. 그 말은 짧았지만, 그 짧음 속에 담긴 무게가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하십니까." "그냥... 사십 년일세."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든 약재를 내려다보았다. "자네가 나를 위해 약재를 손질하고, 부적을 새기고, 이 늙은이의 연단을 도와온 세월이 사십 년이야. 그런데도 나는 자네에게 축기의 길을 열어주지 못했지." 그는 서책을 덮으며 나를 응시했고, 나는 그 시선 안에서 오래 묵은 죄책감 같은 것을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지난 사십 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돌아보는 듯, 무겁고도 아득했다. "만약 오늘 밤 금단을 이룬다면, 나는 반드시 자네를 위한 무언가를 마련할 것이야. 연수단(延壽丹)이든, 그 무엇이든." 나는 그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숙였다. 백 세에 이른 이 몸으로 더 이상의 돌파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헛된 욕심인지, 나는 이미 오래전에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치는 주름진 손등을 보며, 그리고 숨을 고를 때마다 예전보다 무거워진 가슴을 느끼며, 나는 스스로에게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되풀이해서 일러왔다. 하지만 유현담의 그 말 한마디가,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슬며시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미련이 남아 있었던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미루어둔 채, 나는 유현담을 따라 초옥을 나서 강선봉 정상부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길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 어둠 사이로 서쪽 하늘의 붉은 기운이 점점 더 짙게 번져오고 있었다. 발밑에서 밟히는 자갈들이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유독 크게 울리는 듯했고,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무겁게 들렸다. 유현담은 앞장서 걸으면서도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등은 사십 년 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굽어 있었지만, 걸음걸이만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스승님, 서두르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안다, 안다. 그저... 오랜만에 조급해지는구먼."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짧게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평소의 능청스러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산정에 가까워질수록 대기 중의 입자들이 눈에 띄게 조밀해지는 것이 느껴졌고, 마치 이 강선봉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진법처럼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입자안으로 들여다본 산의 기운은 평소의 흐름을 벗어나 서서히 한 지점으로 모여들고 있었으며, 그 중심은 다름 아닌 우리가 향하고 있는 절벽 틈이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 사이로 언뜩 어떤 낮은 울림이 섞여 들려오는 듯했다. 마치 산 전체가 숨을 죽인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마침내 절벽 틈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곳에 자리한 작은 꽃봉오리를 보았다. 소원화였다. 아직 굳게 다물려 있는 그 봉오리는, 하얗다기보다는 옅은 은빛을 띠고 있었으며, 그 표면 위로 미세한 입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맴돌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옅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맡아본 어떤 꽃향기와도 달랐다. 달다기보다는 서늘했고, 서늘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아득한 느낌을 자아냈다. 유현담은 그 앞에 조용히 앉아 좌관에 들어갔고, 나는 그의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떠오르는 달이, 이제는 완연히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홍월이었다. 그 붉은 달빛은 마치 하늘 전체를 태우는 것처럼 번져나갔고, 그 빛이 절벽과 나무와 바위 위로 내려앉을 때마다, 세상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어갔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 붉은 달빛이 절벽 틈의 봉오리에 닿는 순간, 나는 그 은빛 표면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입자안으로 들여다본 봉오리 안쪽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밀도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고, 그 기운은 마치 곧 터질 듯한 압력을 품은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용돌이는 겹겹이 얽힌 실타래처럼 조밀했으며, 그 중심에서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은은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되는구나.' 나는 그 예감과 함께, 옆에 앉은 유현담의 호흡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등 뒤로 흐르는 진기의 흐름이,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것보다도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삼십 년을 기다린 자의 긴장이, 그 좁은 어깨 위에 그대로 얹혀 있는 듯했다. 나는 차마 그를 부를 수 없어, 그저 곁에서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바람이 잠시 멈추었다. 산새 소리도, 벌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전한 정적이 절벽 틈을 감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봉오리의 끝자락에서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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