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연구실 창밖으로 늦가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청동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윈난성 발굴 현장에서 넘어온 물건이었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낯설었다.
산과 강을 겹쳐놓은 듯한 문양. 학계 어디에도 기록이 없는 형태였다. 삼십삼 년을 학자로 살아오면서 이런 문양은 본 적이 없었다.
"교수님, 이거 진짜 물건 맞아요? 아니면 또 어디서 짝퉁 들어온 거 아니에요?"
조교가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손끝으로 문양을 훑었다.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기 전에, 이 재질부터 이상했다. 청동인데 청동 특유의 서늘함이 없었다.
순간 손끝이 뜨거워졌다.
따뜻한 게 아니라 뜨거웠다. 살이 익는 감각까진 아니었지만 분명 통증이었다.
손을 떼려 했다. 그런데 떼어지지 않았다.
"어, 교수님?"
조교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시야가 흔들렸다.
이게 뭐지. 정전기인가. 아니면 뭔가 화학반응이라도.
학자의 습성으로 원인을 따지려는 그 생각조차, 세상이 하얗게 지워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무 천장을 보고 있었다.
낡은 서까래, 짚으로 엮은 지붕.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가 어디지. 발굴 현장 숙소인가. 아니, 이런 구조는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몸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손이 작았다. 손등의 흉터도, 손가락 마디의 굳은살도 내 것이 아니었다. 오십견으로 뻐근해야 할 어깨가 가볍게 움직였다.
이거 뭔가 잘못됐다.
"족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에 근심이 가득했다.
족장님. 나를 부르는 말인가. 나는 그냥 하민준인데.
"제가... 누구입니까."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젊고 낮은,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목이 이렇게 울리던가. 성대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노인의 표정이 굳었다.
"족장님. 정신이 온전치 못하십니까. 하진 족장님이십니다. 하무성 족장님의 아드님이시고요."
하진. 그 이름이 낯설게 울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내 것이라는 감각이 뒤늦게 스며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을 다시 듣는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이었다.
기억이 두 겹으로 겹쳐 있었다. 하민준 교수로서의 삼십삼 년과, 하진이라는 청년의 이십 년이 동시에 존재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침착했다. 학자의 습성인지, 아니면 이 몸에 원래 배어 있던 성정인지 알 수 없었다.
패닉에 빠져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차분하지.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습니까."
"이틀입니다. 아버님의 실종 소식을 듣고 쓰러지신 뒤로요."
아버님의 실종. 하무성. 전대 족장.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이 떠올랐다. 하진의 아버지, 무산 부족의 전대 족장. 사냥 원정을 나간 지 일 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
원정. 사냥. 부족. 이 단어들이 낯설지 않게 머릿속에 자리를 잡는 게 더 이상했다.
"몸은... 어떠십니까."
노인이 다시 물었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젊은 얼굴이었다. 코와 눈매의 선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거울이 있었다면 한참을 들여다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당장 노인 앞에서 "저는 사실 21세기 대학 교수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노인이 안도한 얼굴로 물러났다.
"고덕수 원로께서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족 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부족 회의.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이해도 다 못 한 상황에 회의를 하라니.
강의 하나 준비하는 데도 며칠씩 걸리는데, 이건 아예 준비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군.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익숙한 동작으로 옷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진의 몸이 나보다 먼저 이 세계의 규칙을 알고 있는 듯했다.
손이 옷깃을 여미는 순서, 허리끈을 묶는 방식, 심지어 걸음을 뗄 때 무게 중심을 옮기는 습관까지. 머리로는 모르는데 몸이 알고 있었다.
이게 몸에 새겨진 기억이라는 건가. 그럼 나는 이 몸의 세입자인 셈인가.
천막 밖으로 나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졌다.
젊은 족장. 그것도 아버지의 실종으로 얼떨결에 자리에 앉게 된 애송이.
시선 속에 담긴 감정이 읽혔다. 기대라기보다는 불안이었다.
몇몇 노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아이를 안은 여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었다. 대놓고 한숨을 내쉬는 사냥꾼도 있었다.
책임감이라는 게 이런 무게였구나. 처음 실감했다.
원로들이 모인 천막으로 들어섰다.
가장 상석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족장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고덕수. 최고령 원로. 전대 족장을 오래 섬긴 충신이라는 기억이 스쳤다.
기억이 스치는 순간마다 이상한 이질감이 함께 왔다. 남의 서랍을 뒤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괜찮습니다. 회의를 시작하시죠."
내 말에 원로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걱정과 의구심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저 표정, 학회에서 발표 준비 안 된 발표자를 보는 눈빛과 똑같잖아.
고덕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하무성 족장님의 생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나 원정을 나간 지 일 년 하고도 삼 개월이 지났습니다. 이제 부족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족장을 세워야 합니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솔직한 말이었다. 준비가 안 된 건 하진도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애초에 부족을 이끄는 법 같은 건 배운 적도 없다. 학위 논문 심사는 받아봤어도.
고덕수의 눈이 깊어졌다.
"준비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족장님. 그것이 세습이라는 것이지요."
반박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준비가 되고서야 시작하는 일은 세상에 별로 없었다.
원로들의 시선이 점점 무거워지는 가운데 천막 입구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죽신이 흙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급하게 가까워졌다.
젊은 전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들어왔다.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족장님! 원로님들! 흑산 부족의 사신이 국경 초소에 도착했습니다!"
천막 안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누군가의 숨소리마저 멈춘 것 같은 정적이었다.
흑산 부족.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이 불길한 무게로 가라앉았다. 무산 부족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세력이라는 것을, 이 몸이 이미 알고 있었다.
산맥 너머 수십 개의 부족을 흡수하며 몸을 불려온 세력. 무산 부족 같은 작은 씨족은 그들 눈에 먹잇감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도.
고덕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시기에... 왜 지금."
노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평생을 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의 얼굴에 저런 두려움이 걸리는 걸 보니,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실감이 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다.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이 순간에.
족장이 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이 부족의 목줄에 손이 닿아오고 있었다.
천막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나에게 쏠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들이었다.
나는 아직 이 몸에 완전히 적응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미 내게 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젊은 전사의 숨소리만이 천막 안을 채웠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있다면 그게 뭘까.
빗소리는 아까부터 그친 지 오래였는데, 여기 이 세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는지 천막 밖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신이라니. 하필 지금.
목이 타는 감각이 이 몸의 것인지, 내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