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본진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밑에서 흙이 부서지는 소리마다 심장이 따라 뛰었다. 이미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공터에 지금은 창을 든 전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갑주를 서둘러 걸친 흔적, 흔들리는 손, 굳은 표정들.
본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사들이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박철산이 나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고, 숨은 거칠었다.
"족장님! 흑산의 병력이 들이닥쳤습니다. 국경 초소를 그냥 지나쳐 왔습니다!"
"규모는."
"오백입니다. 우리 전사는 이백이 채 안 됩니다."
숨이 턱 막혔다.
두 배가 넘는 병력 차. 게다가 상대는 흑산 부족의 정예일 것이다. 흑산이라면 십 년 전 동쪽 부족을 하루 만에 짓밟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지금은 그 말이 가진 무게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협상을 시도할 시간도 안 준 겁니까."
"처음부터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박철산의 목소리에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았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통보였다.
본진 앞 넓은 공터로 향하는 짧은 순간, 나는 허리춤의 청동 조각을 슬쩍 매만졌다. 차가웠다. 성지에서 느꼈던 그 뜨거움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그저 평범한 쇳조각처럼 손끝에 닿았다.
제발 지금 반응해줘.
공터에 흑산의 병력이 도착했다.
검은 갑주의 물결이 지평선을 뒤덮었다. 그 숫자는 눈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대열은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했고, 발소리는 하나로 뭉쳐 땅을 울렸다.
쿵, 쿵, 쿵.
그 규칙적인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가슴까지 흔들었다.
그 선두에 말을 탄 젊은 남자가 있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갑주, 붉은 술이 늘어진 창. 자신감으로 가득한 미소.
"저자가 황웅입니다. 흑산 부족의 소족장."
박철산이 낮게 말했다.
황웅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말발굽 소리가 공터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의 눈이 나를 훑었다. 위아래로, 마치 값어치를 재는 듯한 시선이었다.
"네가 무산의 새 족장이냐. 애송이구나."
조롱이 섞인 말투였다.
내 옆에서 임강수의 손이 창대를 움켜쥐는 게 보였다.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
"답신은 아직 준비 중이었습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썼다. 저자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황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공터 전체에 퍼졌다.
"준비? 우리 부족주께서 조건을 내리셨는데 무산의 애송이가 시간을 끄는 게 답신이냐."
"조건이 지나치게 과합니다. 재고를 요청하는 것은 정당한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절차."
황웅이 창을 휘둘렀다. 창끝이 허공을 갈랐다.
서걱.
근처의 나무 기둥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굵기가 사람 몸통만 한 기둥이었다. 절단면은 마치 예리한 검으로 자른 듯 매끈했다.
주변의 전사들이 숨을 삼켰다.
이런 힘의 차이는 처음 본다.
내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저 창이 사람의 몸에 닿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틀렸다.
"내가 절차 따위를 지켜야 할 것 같으냐. 서은채를 내놓아라. 여인들도 함께."
황웅의 눈빛에 여유가 넘쳤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이미 안다는 태도였다.
서은채.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뒤쪽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흥정거리로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임강수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이런 무도한 요구를 어찌...!"
"강수야, 물러서!"
박철산이 소리쳤지만 늦었다.
황웅이 손짓 한 번으로 뒤에 있던 전사 하나를 앞으로 보냈다.
체구가 산만 한 남자였다. 도끼를 들고 있었다. 어깨 근육이 갑주 사이로 불거져 있었고, 그의 걸음마다 땅이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을 보여주지."
콰앙!
도끼가 임강수를 향해 떨어졌다.
임강수가 겨우 몸을 틀어 피했지만, 반격할 틈이 없었다. 그의 발이 흙바닥에 미끄러지며 균형이 흔들렸다.
두 번째 도끼질.
서걱!
임강수의 팔뚝이 갈라졌다. 피가 튀었다. 붉은 방울이 흙 위에 점점이 떨어졌다.
"강수!"
박철산이 뛰어들었다. 나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머리는 그 뒤를 따라가지 못했다.
[산하인의 잠재가 미약하게 반응합니다.]
허리춤의 청동 조각이 다시 뜨거워졌다. 손끝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 힘도 발현되지 않았다. 그저 열기만 있을 뿐이었다.
왜 지금은 안 되는 거야.
성지에서 본 그림자는 분명 무언가를 말해주려 했다. 그런데 지금, 가장 필요한 순간에는 아무런 답이 없다. 청동 조각은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뜨겁기만 하고 침묵했다.
박철산이 임강수를 끌어냈다. 상처는 깊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를 악문 채 신음을 참고 있었다.
"참아라, 강수야. 조금만 참아."
박철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황웅이 그 모습을 보며 즐거운 듯 웃었다.
"이게 너희들의 실력이냐. 이걸로 우리와 맞서겠다는 거냐."
그의 뒤로 오백의 병력이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숫자로 존재감을 과시할 뿐이었다. 대열의 맨 앞줄, 갑주 사이로 보이는 눈빛들이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이미 승패가 정해졌다는 눈이었다.
"오늘은 경고로 삼겠다. 사흘의 시간을 주지. 사흘 후, 답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황웅이 창끝으로 본진을 가리켰다.
"이 마을 전체를 태워버리겠다."
그가 말을 돌려 병력과 함께 물러났다.
발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먼지구름이 다시 지평선으로 사라졌다.
남은 우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였다.
임강수의 상처를 급히 치료하는 손길들, 두려움에 굳은 전사들의 얼굴. 누군가는 주저앉아 흐느꼈고, 누군가는 창을 놓지 못한 채 멍하니 흑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철산이 나를 돌아보았다.
"족장님. 방금 무슨 힘을 쓰려 하신 겁니까."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뭔가를 눈치챈 표정이었다.
나는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산하인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설명한다고 해도 믿어줄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미친 소리로 들릴 게 뻔했다. 성지에서 그림자를 봤다고, 청동 조각이 뜨거워졌다고 말하면 저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짓말이었다. 박철산의 눈에 의심이 스치는 것이 보였다. 그는 더 캐묻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임강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상처를 묶은 붕대에 이미 붉은 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족장님, 저놈들과 맞서 싸울 방법이... 정말 없는 겁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사흘.
오백 대 이백. 그리고 저 압도적인 무력의 격차.
무엇으로도 뒤집을 수 없는 숫자였다. 전사 한 명 한 명의 실력을 아무리 끌어올린다 해도, 저 도끼 한 번에 부러지는 창대와 저 창 한 번에 잘려나가는 나무 기둥의 격차를 좁힐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 성지에서 본 그 그림자, 그리고 산하인의 반응.
뭔가가 분명 있다. 아직 열리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는 사흘 안에 그 문을 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가는 동안 나는 청동 조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뜨거웠던 열기는 어느새 다시 식어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흘. 겨우 사흘.
그 안에 답을 찾지 못하면, 이 마을은 불타고 사람들은 죽거나 끌려갈 것이다. 그 사실이 목덜미를 짓누르듯 무겁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