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력 0, 장비는 만렙

4화

한빛 주조공방은 영지 외곽, 대장간 골목 끝에 있었다. 골목을 따라 걷는 동안 매캐한 숯 냄새와 쇠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다른 대장간들을 지나칠 때마다 시뻘건 화로 불빛이 창문 밖으로 새어 나왔고, 땀에 젖은 대장장이들이 웃통을 벗은 채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 세계도 노동 강도는 만만치 않구나. 낡은 목조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간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페인트가 반쯤 벗겨진 나무판에 '한빛 주조공방'이라는 글씨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뜨거운 열기와 쇠 냄새, 그리고 규칙적인 망치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탕, 탕, 탕. 화로 하나가 구석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 열기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이마에 땀이 배어났다. 코끝에는 뜨거운 금속 특유의 냄새와 함께 은은한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기가 내 일터다." 박정호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작업대 위에는 완성된 반지, 목걸이, 그리고 크고 작은 도구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정과 망치는 크기별로 벽에 걸려 있었고, 한쪽 선반에는 이름 모를 금속 조각들이 종류별로 분류되어 쌓여 있었다. "이거 다 아저씨가 만든 거예요?" "내가 만들었거나, 내가 부마 넣은 거지." 부마.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부마가··· 아저씨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당연하지. 이 공방은 부마 전문 공방이다." 그가 작업대 한쪽에 놓인 반지를 집어 들었다. 은빛 반지였는데, 표면에 미세하게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문양이 살짝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건 화염 저항 반지야. 3등급 마력만 있어도 부마 넣을 수 있는 물건이지." "그러면 저처럼 0등급인 사람은···" "당연히 안 되지. 부마는 마력을 물건에 주입하는 기술이니까, 마력이 없으면 못 해." "그런데 저는 어제 그걸 했잖아요." 박정호가 반지를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눈빛이 어제부터 계속 그랬던, 뭔가를 캐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다. 0등급이 부마를 했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도 중급 이상 결과물이 나왔다는 것도 이상해." ···어쩐지. 나만 알고 있는 시스템 창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하지만 그걸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제가 이 세계 게임인 줄 알고 있고 상태창도 볼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가는, 이 아저씨가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거나, 아니면 실험 대상으로 팔아넘길지도 몰랐다. 둘 다 사양이었다. "제가 뭔가 특이한 스킬을 갖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최대한 얼버무렸다. 박정호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그 표정에서 '더 캐물어봐도 소용없겠다'는 포기의 기색이 살짝 스쳤다. "일단,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 오늘부터 기초부터 가르쳐줄 거다." "기초요?" "이 세계에서 마력과 부마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그걸 알아야 뭘 하든 하지." 박정호가 작업대에 앉으며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첫째, 마력 등급은 0등급부터 9등급까지 나뉜다. 왕가나 대귀족은 보통 7등급 이상이고, 평범한 기사나 마법사는 3에서 5등급 사이야." "저는 0등급이니까 완전 바닥이네요." "그렇지. 근데." 그가 손가락을 하나 더 세웠다. "둘째, 부마는 마력 등급이 아니라 마력 제어력이 관건이다. 등급이 높아도 제어를 못 하면 부마 실패하고, 등급이 낮아도 제어를 잘하면 성공한다." "그럼 저는 등급은 낮은데 제어력이 좋다는 거예요?" "모르겠다. 그게 이상한 부분이야. 0등급은 마력 자체가 거의 없어서 제어할 마력조차 없는 게 정상인데···" 박정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고, 턱을 문지르는 손길에서 진짜로 이해가 안 간다는 게 느껴졌다. "넌 마력이 아니라 다른 뭔가를 쓰고 있는 것 같다." ···정답입니다, 아저씨. 저는 게임 시스템을 씁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나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셋째." 박정호가 세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방금까지의 미묘한 궁금증은 사라지고, 뭔가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사람의 얼굴이 됐다. "이게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거다. 이 나라에는 성인식 규정이라는 게 있다." "성인식 규정이요?" "18세가 되기 전에, 마력이든 부마 기술이든 뭐든 하나는 국가공인 자격을 따야 해. 못 따면···" 그가 잠깐 멈췄다. 화로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며 명암을 갈랐다. "평민으로 강제 편입된다." ···뭐, 평민으로 강제 편입? 머릿속에서 뭔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금까지 남작가 도련님이라는 신분에 딱히 애착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평민으로 떨어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 지금 남작가 도련님인데···" "남작가라도 예외 없다. 오히려 귀족 자제일수록 더 엄격하게 봐. 격에 안 맞는 무능력자가 신분 유지하는 걸 나라에서 안 좋아하니까." 박정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도 이해는 간다. 능력 없이 신분만 있으면 나라 자원 낭비니까." 와, 이 세계 복지제도 진짜 살벌하네. "그럼 제가 몇 살까지 자격을 따야 하는데요?" "넌 지금 열다섯이니까, 3년 남았다." 3년.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동시에 무슨 자격을 어떻게 따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3년이라는 숫자가 길게 느껴지는 건지, 짧게 느껴지는 건지도 헷갈렸다. "그 자격이라는 게, 어떻게 따는 건데요?" "제일 흔한 방법은 각 분야 조합의 승인 시험을 통과하는 거지. 대장장이 조합, 마법사 조합, 기사단··· 그리고 우리 같은 주조 조합." "주조 조합 시험이 있어요?" "있지. 부마 아이템 하나를 만들어서 심사위원 앞에서 평가받는 방식이야." 박정호가 팔짱을 끼며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왠지 미리 걱정하는 눈빛처럼 느껴졌다. "근데 시험 응시 자격이 또 문제야." "또 뭐가 있는데요?" "보통 최소 3등급 마력이 있어야 응시 자격을 준다. 0등급은 원래 시험 자체를 볼 수도 없어."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면서, 방금 전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을 한심하게 만들었다. "그럼 저는 시험도 못 보는 거예요?" "정상적인 경로로는 그렇지." 박정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딱 하나, 예외 조항이 있다. 조합장 직권으로 특례 응시를 허가할 수 있어. 대신 그건 조합장이 직접 결정하는 거라,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그 조합장이라는 분, 어떤 사람인데요?" "우리 한빛 주조공방이 소속된 대륭 주조 조합의 조합장은, 성격이 좀··· 까칠하다." 박정호가 헛기침을 했다. 그 헛기침에서 뭔가 말하기 곤란한 사연이 숨어 있는 것 같았지만, 더 캐묻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마침 다음 달에 정기 승인 시험이 있어. 그때 응시자 명단 접수가 이번 주까지야." 이번 주까지.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촉박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방금까지 3년이라는 숫자에 안심하던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실제 상황은 며칠 단위로 좁혀지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 바로 신청해야 하는 거예요?" "신청은 내가 알아서 해볼 테니, 너는 그동안 물건을 하나 만들어야 한다. 시험 때 보여줄 물건." "뭘 만들어야 하는데요?" 박정호가 작업대 위 도구들을 훑어보다가, 낡은 쇠 조각 하나를 집어 들어 내게 던졌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표면이 거칠고 녹이 살짝 슬어 있었다. "뭐든 좋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만들어봐. 시험 날까지 딱 보름 남았다." 쇠 조각을 받아든 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가운 금속의 무게가 손바닥에 그대로 느껴졌다. 보름.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크게 울렸다. 게임에서 봤던 온갖 시한부 퀘스트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대부분은 실패하면 마을이 불타거나, 히로인이 죽거나, 최소한 아이템 하나는 사라지는 그런 종류였다. ···이거 완전 시한부 퀘스트잖아. "보름 안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다음 정기 시험까지 기다려야지. 근데 그게 6개월 뒤다." 6개월. 3년 중에서 6개월을 그냥 날려버린다는 소리였다. 갑자기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다는 게 실감났다. "그러니까 이번에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소리네요." "그렇지. 그리고 하나 더." 박정호가 손가락을 하나 더 세웠다. 이제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포기했다. "시험 통과율이 평균 4할이다. 정상적으로 마력 있는 애들도 절반 넘게 떨어진다는 소리야." ···와, 진짜 살벌하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쇠 조각을 손에 꼭 쥐고 걸었다. 저녁 공기가 차가워서 콧속이 시큰거렸고,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날 밤, 나는 작업창을 다시 열어봤다. 【부마 스킬: 도구 강화 (미숙련)】 【사용 가능 재료: 낡은 쇠 조각】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까보다 조금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는 흐릿하게 반쯤만 보이던 항목들이, 지금은 또렷하게 글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옵션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옵션 목록 맨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뭔가가 적혀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봐도 흐릿해서 읽히지 않았다. 마치 아직 해금되지 않은 정보 같았다. 그리고 그 무지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의 시작이라는 것도, 그때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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