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위장 초능력 택시기사

3화

다행히 그건 그냥 담배 피우는 취객이었다. 허탈해서 웃음이 났다. 반년 만에 얼굴을 갈아치웠다고 이렇게 예민해질 일인가. 아니, 예민해질 만하지. 흑성회한테 냄새 맡힌 사람이 편하게 잠들 수 있을 리가 없다. 골목 어귀에 서서 담벼락에 기대 있던 취객은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목례만 하고 지나쳤다. 심장은 아직도 쿵쿵 뛰고 있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방금까지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옷 속의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습관이 무섭다. 스승님 밑에서 몇 년을 살았더니 몸이 먼저 반응한다. 위협이라고 판단하면 손이 먼저 나가고, 머리가 그 다음에 따라온다. 그게 지금은 오히려 문제였다. 대학생 이도윤으로 살기로 한 이상, 골목에서 취객 하나 보고 몸이 전투태세로 들어가는 건 곤란하다. 누가 보면 이상한 애 취급받기 딱 좋다. 대학생 노릇은 생각보다 성가셨다. 수강신청이라는 걸 처음 해봤는데, 클릭 몇 번으로 강의가 다 차버리는 시스템 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마우스를 눌러야 한다는 것도, 그 몇 초 사이에 인기 강의가 통째로 사라진다는 것도 다 낯설었다. 스승님이 계셨으면 "그냥 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지" 하고 웃었을 텐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얌전히 남은 강의 중에 아무거나 골랐다. 결과적으로 시간표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9시에 몰려 있었고, 하루는 강의 하나만 듣고 끝나는 요일도 있었다. 균형이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시간표였다. ..이게 무슨 짜임인가 싶긴 한데, 뭐 어쩌겠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다. 첫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는 다들 나를 슬쩍슬쩍 쳐다봤다. 신입생 특유의 어색함이 아니라, 편입생 특유의 낯선 기운을 알아채는 눈빛들이었다. 조 편성이 있던 수업에서 옆자리 학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이도윤 씨, 처음 보는 얼굴인데. 편입생?" "네, 이번에 왔습니다." 같은 조에 배정된 학생들이 물었다. 대답을 준비해둔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스승님이 준 신분증 세트에는 심지어 학적 기록까지 완벽하게 딸려 있었다. 전공, 학번, 이전 학교 이름까지 다 짜여 있었다. 누가 물어봐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게, 마치 실제로 그 학교를 다녔던 사람처럼. ..그 양반, 도대체 얼마나 준비를 해둔 거야. 가끔은 그게 더 무서웠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런 걸 다 준비해놓은 사람처럼 느껴져서. 아니, 실제로 준비해뒀을지도 모른다. 스승님이 하는 일 중에 상식으로 이해되는 게 별로 없었으니까. 캠퍼스에서의 나흘째, 학생회관 지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넘기고 있었는데, 유리창에 비친 캠퍼스 풍경이 여전히 낯설었다. 나무들 사이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모습, 웃음소리, 커피 냄새. 이런 평화가 나한테 허락된 게 맞나 싶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누군가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야, 도윤이 너 살아있었냐?" 젓가락질을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가 웃고 있었다. 짧은 머리, 순박해 보이는 인상인데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강현우. "..현우야?" "뭐야, 반응이 왜 그래. 유령 봤냐?" 현우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였다. 중간에 서로 연락이 끊긴 게 몇 년 됐다. 나는 스승님을 만나느라 바빴고, 현우는 어디론가 갔다는 소문만 들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아마 중학교 졸업식쯤이었나. 그 뒤로는 서로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너 여기 왜 있어?" "학교 다니지. 편입했다." 입에서 나온 거짓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스스로도 놀랐다. 연습을 많이 하긴 했는데, 막상 옛 친구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나오니 조금 씁쓸했다. 이렇게 거짓말이 몸에 붙어버렸구나. "편입? 너가?" 현우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야, 너 원래 공부랑 안 친했잖아. 초등학교 때 받아쓰기 시험에서 삼십 점 맞은 놈이 무슨 편입이야." "..사람이 좀 변할 수도 있지." "허, 신기하네. 그 삼십 점 맞은 애가 대학생이라니." 현우는 컵라면을 하나 더 시켜서 내 앞에 앉았다. 뜨거운 물을 붓고 삼 분을 기다리는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몇 년을 안 봤어도 여전히 편한 상대였다. 옛날 얘기를 몇 마디 하다가, 초등학교 운동회 때 이야기, 담임선생님 흉내를 잘 냈던 짝꿍 이야기, 그런 것들을 주고받다가, 문득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너 요즘 한성 시내 돌아다니지 마라." "왜." "흑성회 애들이 요즘 눈에 띄게 움직여. 나도 위쪽에서 대충 듣는 거라 자세히는 몰라도, 뭔가 큰 그림이 있는 것 같더라고." 순간 손에 든 나무젓가락이 아주 살짝, 눈에 안 보일 정도로 휘었다. ..현우 너, 지금 그거 알고나 하는 소리냐. 속으로는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라면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면서 시선을 피했다. "넌 그런 걸 왜 알아?" 물어봤다. 현우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였다. "나 국가초능력관리국에서 일해. 초급전사로." 예상은 했지만, 확인받으니 또 다른 기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싸움 잘하고 눈치 빠른 놈이었으니, 뭔가 그런 쪽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다. 그런데 실제로 확인을 받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럼 저놈도 나 같은 놈이란 소린데. 같은 세계에 발을 들인 놈이 하나 더 있었구나. 그것도 하필이면 어릴 때 알던 놈이.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데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냐." "친구니까 하지, 그럼 남한테 하냐." 현우가 어깨를 툭 쳤다. 그 손길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힘이 세다는 것도, 장난처럼 툭 치면서도 진심이 묻어 있다는 것도. "너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도 궁금하고. 갑자기 대학생 됐다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근데 진짜야, 요즘 조심해라. 시내 쪽 골목, 특히 저녁 시간대는 피해." "..알겠다." 대답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자식, 서지안 얘기는 언제 나오는 거야. 내 감이 그랬다. 현우가 이렇게 대뜬금없이 흑성회 얘기를 꺼낼 리가 없는데, 뭔가 더 있을 것 같다는 감. 이 자식이 옛날부터 이런 식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뒤에다 숨겨두고, 별거 아닌 것처럼 슬쩍 흘리는 버릇. 서지안이라는 이름을 들은 건 그 다음 대화에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 요즘 개인 임무가 하나 있어." "뭔데."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현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예전에 몰래 게임기 훔쳐 놓고도 저런 표정을 지었던 게 기억났다. 그때도 딱 저런 눈이었다.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데, 동시에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 눈. "야, 너 뭔데 그런 표정을 지어?" "아니 그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아 몰라, 오늘은 안 할래." "야, 강현우."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현우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다 먹지도 않은 컵라면을 그대로 두고, 어깨에 멘 가방을 다시 추스르면서 편의점 문을 밀고 나갔다.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저놈 저거, 또 뭔가 사고 치고 다니는 게 분명하다. 어릴 때도 그랬다. 뭔가 큰일을 벌여놓고 나서 꼭 저런 표정으로 도망가듯 자리를 떴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 옆반 애랑 싸우고 나서도, 담임선생님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빼놓고 나서도 딱 저런 걸음걸이였다. 뭔가 켕기는 게 있을 때 나오는 걸음. 식어버린 라면을 마저 먹었다. 국물이 이미 미지근해져서 맛이 없었다. 그래도 억지로 다 비웠다. 뭘 씹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 나았다. ..서지안. 임무. 흑성회.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엮여 있는 건지. 편의점을 나와서 원룸까지 걸어가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캠퍼스는 저녁이 되니 인적이 뜸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나뭇잎 그림자가 흔들렸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날 밤, 원룸 창문 앞에 서서 캠퍼스를 내려다봤다. 창밖으로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늦게까지 불이 켜진 도서관 창문들,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몇 안 되는 그림자들. 다시 만난 친구,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 그리고 이름조차 모르는 임무 하나. 창틀에 손을 짚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반년 전과 완전히 다른 얼굴, 이도윤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얼굴. 그 얼굴이 오늘 하루 종일 거짓말을 하고, 옛 친구 앞에서도 진짜 감정을 숨기고,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반년 만에 내 세상이 갑자기 넓어진 기분이었다. 좋은 쪽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 흑성회, 서지안, 현우의 임무. 이 조각들이 언젠가 하나로 맞춰질 거라는 예감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리고 그 예감은 대개, 틀린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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