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요즘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잔다.
서지안. 서씨그룹 영애, 지안텍이라는 회사 총재. 한 달 전, 남해안 골든베이 리조트에서 처음 봤다. 정확히는 처음 부딪힌 거다. 내가 임무 중이었고, 그쪽은 개인 휴가 중이었고, 내가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를 제압하다가 그 사람 앞에서 정체가 드러나 버렸다.
..그날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관리국 상부에서는 그날의 사고를 '노출 사고'라고 부르고, 나는 그날부터 서지안 보호 임무를 개인적으로 맡게 됐다. 정식 보고서에는 절대 안 올라가는, 그냥 나 혼자 짊어진 짐 같은 임무.
초급전사 강현우. 초고속 이동, 초강력 격투, 디지털 조종. 세 가지 능력을 가진 게 자랑이라면 자랑인데, 요즘은 그게 자랑이 아니라 부담으로 느껴진다.
능력이 세 개라고 하면 사람들은 다 부러워한다. 근데 능력 세 개 가진 놈이 인력 지원은 하나도 못 받는다는 건 누가 알까. 초고속 이동 해봤자 하루에 잘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뿐이고, 초강력 격투 해봤자 몸에 멍만 늘고, 디지털 조종 해봤자 서류 조작밖에 못 쓴다. 이럴 거면 그냥 능력 하나 없이 태어나서 칼퇴하는 삶이 낫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다가도 서지안 씨 얼굴 떠오르면 또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게 무슨 심리일까.
오늘도 관리국 사무실 구석에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흑성회 관련 첩보 보고서. 최근 들어 조직 내부에서 큰돈이 움직이는 게 감지됐다는 내용이었다. 옆자리 선배는 벌써 세 번째 커피를 타 마시면서 나한테 말도 안 걸고 자기 일만 하고 있었다. 다들 이 사건이 얼마나 큰 건지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는 분위기였다.
[속보] 국가초능력관리국 내부 첩보에 따르면, 최근 흑성회가 특정 민간인을 대상으로 10억 신용점 규모의 암살 의뢰를 내부적으로 발주한 것으로 추정돼. 대상자 신원은 아직 공식 확인되지 않았어. 관계 부처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
나는 이미 그 대상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서지안이다.
윗선은 알고도 모른 척한다. 서씨그룹 쪽과 어떤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 있는지, 관리국은 정식 보호 인력을 배정하지 않고 나 혼자한테 비공식적으로 떠넘겼다. 초급전사한테. 그것도 나 개인적으로.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상관한테 대놓고 물어본 적도 있다.
"이런 큰 임무를 왜 저 혼자 맡기십니까?"
"자네가 이미 대상자와 접점이 있으니까 그렇지. 다른 인원 투입되면 오히려 눈에 띈다."
말은 그럴싸한데 결국 나 혼자 다 알아서 하라는 소리였다. 예산도 없고 지원 인력도 없다.
"그럼 예산이라도 좀.."
"예산 얘기는 다음 분기에 다시 하자고."
다음 분기. 그 소리를 벌써 세 번째 듣고 있다. 다음 분기가 되면 또 다음 분기 얘기를 하겠지. 이 나라 관료 조직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나만 이렇게 당하고 있는 건가. 억울해서 잠이 안 온다는 게 정확히는 이런 상황을 말하는 거였다.
그런 상황에서 도윤이를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초등학교 동창인데 몇 년 만에 마주쳤다. 동네 편의점 앞에서 담배 피우고 있는 놈을 보고 처음엔 딴사람인 줄 알았다. 얼굴은 그대로인데 분위기가 달랐다. 옛날에는 순둥순둥한 얼굴로 만화책만 보던 놈이었는데.
근데 웃긴 건, 도윤이 몸에서 뭔가 낯선 기운이 느껴졌다는 거다.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저 자식, 뭔가 숨기고 있다.
확신은 없다. 근데 초급전사로 몇 년 뛰다 보면 사람 몸에서 나는 이상한 기류를 느끼는 감이 생긴다. 도윤이한테서 나는 기운은,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익숙한 종류였다. 우리 쪽 사람들, 능력자들한테서 나는 냄새.
그날은 대충 넘겼다. 안부 좀 묻고 연락처 교환하고 헤어졌다. 근데 계속 신경이 쓰였다. 집에 와서 씻으면서도, 밥 먹으면서도, 서지안 씨 보호 스케줄 짜면서도 자꾸 도윤이 생각이 났다. 이게 뭐라고 신경이 쓰이나 싶었는데, 능력자 특유의 감이라는 게 한번 걸리면 잘 안 사라진다.
며칠 뒤 밤, 학교 앞 옥상 술집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엔 내가 먼저 연락했다.
옥상 술집이라고 해봤자 낡은 파라솔 몇 개랑 플라스틱 테이블이 전부인 곳이었다. 그래도 야경 하나는 봐줄 만했다. 도윤이는 먼저 와서 맥주 두 병을 시켜놓고 있었다.
"야, 저번에 하려던 얘기 있었잖아."
도윤이가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이걸 얘기해도 되는 건가. 관리국 규칙상으로는 절대 안 되는 일이다. 근데 도윤이라면 왠지 믿음이 갔다. 어릴 때부터 입 무거운 놈이었다. 초등학교 때 내가 짝사랑하던 애 이름도 6년 동안 아무한테도 안 흘린 놈이다.
"..나 지금 어떤 사람 하나 보호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흑성회 표적이야."
"흑성회가 왜 민간인을 노려?"
"10억 신용점짜리 의뢰가 걸려 있어. 이유는 나도 몰라. 아마 회사 지분 문제거나, 아니면 그냥 힘 자랑이거나."
도윤이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초급전사한테 관찰력 없으면 그날로 밥줄 끊긴다.
"흑성회가 요즘 그런 짓을 하고 다닌다는 거지."
"응. 그것도 대놓고. 예전에는 조심스러웠는데 요즘은 아예 신경도 안 써."
"..누구 짓인지 감 잡히는 거 있어?"
이상한 질문이었다. 보통 사람이면 '왜 그런 짓을 해', '무섭다' 이런 반응이 먼저 나오는데, 도윤이는 마치 흑성회 내부 사정을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물었다. 질문의 온도가 달랐다. 걱정보다는 계산이 먼저 나오는 질문.
"타격조 쪽에서 실행할 거란 소문은 있는데, 정확히는 몰라. 코드네임 '설표'랑 '독랑'이라는 애들이 요즘 왔다갔다한다는 첩보가 있어."
도윤이는 그 이름을 듣고 잠깐 굳어졌다. 몰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맥주병을 쥔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리는 게 보였다. 나만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갔을 미세한 반응.
"..도윤아."
"응?"
"너 뭐 아는 거 있으면 말해도 돼."
"..없어."
대답이 조금 늦었다. 나는 캐묻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라서, 얘가 감추는 게 있을 때는 억지로 캐묻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 때도 그랬다. 부모님 이혼 얘기 절대 안 하던 놈이었는데, 억지로 물어보면 오히려 더 입을 닫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말해주는 타입.
대신 나는 말을 이었다.
"요즘 서지안 씨 일정을 관리하는데, 다음 주에 갤러리 오픈 행사가 있어. 사람 많은 곳이라 나 혼자로는 부족한데, 지원 요청은 위에서 계속 씹혀."
"..위험하네."
"그렇지. 근데 어쩌겠어. 이게 내 임무니까."
도윤이는 잔을 비우고 조용히 말했다.
"그날, 나 시간 되면 그 근처에 있어줄까."
순간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귀를 의심했다. 도윤이가 나서서 뭘 도와주겠다고 하는 건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뭐?"
"할 일도 없고, 그냥.. 궁금하잖아. 네가 무슨 일 하는지."
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야, 너 이제 대학생이잖아. 위험한 데 왜 자꾸 와."
"넌 나한테 조심하라고 하고, 넌 진작에 위험한 데 다니고 있잖아."
그건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 자식,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한다. 예전엔 말도 잘 못 하던 놈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컸나.
"..그래, 뭐. 오면 오는 거지."
그렇게 대충 얘기를 마무리했다. 도윤이는 그 뒤로도 별 얘기 없이 맥주 한 병을 더 시켰고, 우리는 옛날 초등학교 얘기, 담임 선생님 흉보는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웃었던 것 같다. 근데 헤어지고 나서 뒤돌아보니 도윤이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 있었던 게 자꾸 눈에 밟혔다.
그날 밤 헤어지고 나서 곧바로 관리국에서 긴급 호출이 왔다.
[긴급] 서지안 대상자 실시간 위치 노출 정황 포착. 즉시 현장 이동 요망.
술기운이 확 가시는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휴대폰 화면에 뜬 긴급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오탈자가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빨리?
머릿속이 하얘졌다. 서지안 씨 위치가 노출됐다는 건, 흑성회 쪽에서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코드네임 '설표'와 '독랑'. 그 이름들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윤이가 그 이름을 듣고 굳었던 표정도 함께.
나는 뛰기 시작했다. 초고속 이동 능력을 쓸 준비를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계속 도윤이 생각이 났다. 왜 하필 지금, 이런 타이밍에 그 얘기를 들었을까. 왜 도윤이는 그 코드네임을 듣고 그렇게 굳었을까.
..설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자꾸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 생각을 억지로 밀어내며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