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자줏빛 낙인의 밤

2화

한도현은 사부의 처소 앞에서 잠시 숨을 죽였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회랑을 타고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연무장에서 어린 제자들의 기합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평소라면 익숙하게 지나쳤을 소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소리마저 어딘가 낯설게 들렸다. 문 안쪽에서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짧고 얕은, 힘겨운 숨소리였다. 한도현은 그 소리를 들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아는 사부의 기침이 아니었다. 평소의 사부는 기침 한 번에도 산이 울릴 듯한 기세를 담아냈다. 지금 들려오는 것은 마치 누군가의 숨이 목 안쪽에서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사부님?"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나무문 너머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한도현은 손끝으로 문틀을 짚은 채 잠시 기다렸다. 바람이 회랑을 훑고 지나가며 처마 끝의 풍경風磬을 흔들었다. 청량한 쇳소리가 짧게 울리다 사라졌다. 다시 두드렸다. "사부님, 도현입니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목소리는 낮았다. 평소보다 한 톤 가라앉아 있었다. 한도현은 그 낮음이 마음에 걸렸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문을 밀었다. 문을 열자 향내가 짙게 코를 찔렀다. 침향沈香을 태우는 냄새였다. 사부는 늘 마음이 어지러울 때 침향을 태웠다. 한도현이 어릴 적,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일 때도 사부는 이 향을 피워주었다. 그때는 그저 향긋하다고만 생각했다. 지금은 그 향이 어딘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방 안은 어두웠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가지런했고, 벽에 걸린 검은 언제나처럼 검집에 얌전히 담겨 있었다. 탁자 위에는 마시다 만 약탕이 식어가고 있었다. 그 옆에 놓인 그릇에는 손도 대지 않은 듯한 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백현도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붉은 도포는 그대로였지만, 한도현의 눈에 익숙한 그 형상이 어딘가 낯설게 보였다. 등이 조금 굽어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는데, 그 빛 아래로 드러난 주름이 유난히 깊게 보였다. '……사부님이 이렇게 작아 보이신 적이 있었나.' 한도현은 그 생각을 하며 조용히 다가가 앉았다. 방석에 무릎을 꿇는 순간에도 시선은 사부의 손끝에서 떠나지 않았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괜찮다. 나이가 들면 아침저녁으로 뼈마디가 시리는 법이지." 백현도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에는 평소의 여유가 없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한도현은 그 눈을 오래 들여다볼 수가 없어 시선을 살짝 아래로 떨어뜨렸다. "약은…… 드셨습니까." "먹었다. 걱정 말아라." 식어버린 약탕을 보면 그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도현은 굳이 그것을 짚지 않았다. 사부의 거짓말에는 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도현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부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제 가슴의 표식…… 이것이 무엇인지, 오늘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백현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와 발簾을 흔들었다. 발에 매달린 옥구슬이 서로 부딪히며 잘게 소리를 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침향의 연기가 느리게 위로 올라가다가 흩어졌다. 한도현은 그 연기의 끝을 좇으며 사부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흐르는 듯했다. "……옛이야기를 하나 해주마." 백현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40년 전, 청람대륙 동쪽 진씨문파辰氏門派. "그때 나는 이미 홍의를 입은 지 십 년이 넘은 대제사였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하늘의 뜻을 읊는 자라 불렀지." 백현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목소리는 마치 오래된 서책을 넘기듯,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진씨문파는 당시 청람대륙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진법陣法을 세워, 별의 기운을 억지로 끌어와 문파의 힘을 불렸다." "진법의 이름은 천강흡성진天罡吸星陣이라 했다." 백현도가 잠시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별의 정기를 끌어와 문도들의 내공을 몇 배로 불려주는 진법이었지. 대신관들, 장로들, 심지어 어린 제자들까지도 그 진법의 은혜를 입었다. 밤마다 하늘의 별빛이 문파의 지붕 위로 쏟아지듯 내려왔다. 사람들은 그것을 축복이라 불렀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을까." 한도현은 숨을 죽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늘이 노했다. 별이 무너져 내렸고, 그 별의 파편이 문파 전체를 뒤덮었다. 한나절 사이에 삼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백현도의 눈에 잠깐 회한이 스쳤다.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가 물었다. 한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천둥소리와도 다르고, 폭포 소리와도 다르다. 마치 하늘이 통째로 갈라지는 소리다. 나는 그날 그 소리를 들으며, 세상이 끝나는구나 생각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하늘의 뜻을 막지 못한 죄로, 스스로 그 재앙 속에 뛰어들어야 했지. 검을 들지도 않고, 오직 원신元神의 힘으로 그 파편들을 밀어내며 살아남은 자들을 지켜냈다." 백현도는 그 순간을 회상하는 듯 손을 들어 허공을 짚었다. 마치 그때의 불덩이가 다시 그의 눈앞에 떠오른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의 파편이 살갗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세 가지를 생각했다. 살아남은 자를 지켜야 한다는 것. 죽은 자를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하늘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힘이 없었다. "세 번째는, 지금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때 살아남은 자들이 나에게 절을 했다. 하늘의 대신이라 부르며.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알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란 것도 결국은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대가로 치르게 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백현도가 잠시 말을 멈추고 한도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40년 전의 잔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재앙이 있기 전, 하늘의 문헌 속에서 나는 한 가지 문양을 보았다. 자주색 불꽃 모양의 표식. 재난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날 때 나타난다는 표식이었지." 한도현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손끝이 저절로 자신의 가슴께로 올라갔다. 옷자락 아래, 오래도록 감춰온 그 표식이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린 듯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것이, 제 가슴의 표식과 같은 것입니까." 백현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손을 뻗어 한도현의 어깨를 짚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도현은 그 손의 떨림을 어깨로 느꼈다. 평생 단단하기만 했던 그 손이, 지금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도현아." "예, 사부님." "내가 너를 처음 안았을 때, 너는 울지도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이 아이가 재난이 되든, 재난을 막는 자가 되든, 그것은 이 아이의 몫이지 하늘의 몫이 아니라고." 백현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졌다. "너는 세 살 때 처음 걸음을 뗐다. 넘어지고도 울지 않았지. 다시 일어서서 걸었다. 다섯 살 때는 목검을 쥐고 나를 따라다니며 검을 가르쳐 달라 졸랐다.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안 된다 했지만, 속으로는 흐뭇했다." 그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열 살 때, 네가 처음으로 사람을 다치게 한 날을 기억하느냐. 동문 아이와 겨루다 그 아이의 팔을 부러뜨렸었지. 너는 사흘을 굶으며 그 아이의 처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 아이는 결코 재난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 뒤로 5년, 나는 너를 지켜보았다. 너는 재난이 아니었다. 그저 착실하고 정직한 아이였을 뿐." 한도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말을 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겨우 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부님, 왜 오늘 이런 말씀을……" 백현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늙어 보였다. 마치 15년의 세월이 하루 사이에 그의 얼굴 위로 몰려든 것처럼. 한도현은 숨을 삼켰다. 그의 눈이 사부의 얼굴 위를 더듬었다. 눈가의 주름이 더 깊어졌고, 관자놀이의 흰 머리카락이 하룻밤 사이에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입술의 빛깔마저 조금 전보다 옅어진 것 같았다. '……사부님의 얼굴이, 어제와 다르다.' "사부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한도현은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다가앉았다. 사부의 낯빛을 살피는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백현도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만졌다.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에 그 자신도 놀란 듯했다. 잠시 손끝을 뺨 위에 그대로 둔 채, 그는 눈을 감았다. 방 안의 침향 연기가 문득 흔들리다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창밖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그 순간 멎었다. "……벌써 시작되었구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떨어졌다. 한도현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며,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방 안의 향내가 유난히 짙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짙은 향내 속에서, 사부의 숨소리가 다시 짧고 얕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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