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억만장자 복수극

5화

일요일 오전, 청담동은 맑았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고, 도로 위 아지랑이가 벌써부터 여름을 예고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렌트 업체 사무실로 나가 롤스로이스 팬텀을 확인했다. 은색 바디에 왕관 모양 로고가 박힌 스피릿 오브 엑스터시가 보닛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이 차 한 대 값이 내 평생 벌 돈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그 계산이 오늘 하루 나를 얼마나 큰 사람으로 보이게 할지도 함께 떠올랐다. 렌트비, 기사 인건비, 윤하나에게 줄 출연료까지 합치면 오늘 하루치 지출이 내 한 달 생활비를 훌쩍 넘었다. 그 숫자를 떠올리는 순간 속이 서늘해졌지만, 이건 투자다, 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었다. 값을 매기는 일을 오래 해온 사람답게, 나는 이 하루의 손익을 이미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계산해본 뒤였다. 박덕수는 이미 아르마니 정장을 갖춰 입고 차 옆에 서 있었다. "태현 씨, 아니 대표님." 그가 웃으며 존칭을 바꿨다. "들어가시죠." 그 존칭 하나에 이상하게 마음이 단단해졌다. 돈으로 산 존칭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이 내 몸속 어딘가를 데워주는 것 같았다. 윤하나도 곧 도착했다. 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안경을 쓰고, 검은 슈트를 입은 그녀는 실제로 어느 대기업 임원 비서처럼 보였다. "미아 윤, 준비됐습니다." 그녀가 짧게 인사했다. 그 짧음 속에 프로다운 절제가 느껴졌다. 윤하나는 원래 연극배우였다고 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오 년, 케이블 드라마 단역으로 삼 년. 그 경력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가 커리어를 헛되이 쓴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오늘 아침 그녀가 대본 없이 서지아와 김도윤의 성향을 미리 물어보던 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프로인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녀는 상대의 말투와 태도를 먼저 파악한 뒤에야 자신의 역할을 완성하는 배우였다. 우리는 차에 올랐다. 뒷좌석에 앉는 순간, 가죽 냄새와 함께 낯선 감각이 몸을 감쌌다. 이런 차의 뒷자리에 앉아본 적이 평생 없었기에, 그 낯섦이 오히려 내게 자신감을 만들어줬다. 이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테니, 나는 애써 어울린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시트는 손을 대는 순간 몸의 온도에 맞춰 서서히 데워지는 느낌이었고, 창문은 소리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을 만큼 두꺼웠다. 이 차가 왜 이렇게 비싼지, 그 이유를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방음, 승차감, 마감의 디테일—전당포에서 물건 값을 매길 때 늘 확인하던 것들이 자동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좋은 물건은 어디서나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카페까지는 이십 분 거리였다. 차창 밖으로 도로가 미끄러지듯 지나갔고, 나는 그 흐름 속에서 마지막으로 각본을 되짚었다. 서지아와 김도윤은 열한 시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열한 시 오 분에 도착하기로 시간을 맞췄다. 그들이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한 직후, 가장 극적인 순간에. 박덕수가 백미러로 나를 한 번 쳐다봤다. "대표님, 저 카페 몇 번 가봤는데예. 거 창가 자리 잘 보이는 데 앉으모 딱입니다."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지가 각도까지 봐놨습니다." 그 능글맞음 속에는 진짜 배우 못지않은 몰입이 있었다. 이 남자는 사기를 치는 게 아니라 사기라는 무대에 서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윤하나는 조수석에서 조용히 서류를 넘기는 척했다. 실제로는 아무 내용도 없는 백지였지만, 그 넘기는 손짓 하나가 그녀를 완벽한 비서로 만들었다. 나는 그 손짓을 보며, 사람을 믿게 만드는 건 결국 디테일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 카페 앞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정확히 열한 시 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덕수가 차를 세우고 뒷문을 열어줬다. 나는 천천히 내렸다. 롤스로이스의 문이 열리는 소리, 그 낮고 무거운 경첩 소리가 카페 앞을 지나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지나가던 여자 둘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 쪽을 쳐다봤다. 그 시선 하나에도 어깨가 펴졌다. 사람은 참 간단하게 만들어진 존재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차 한 대, 정장 한 벌, 시선 몇 개면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진다. 창문 너머로 서지아가 보였다. 그녀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김도윤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으로 돌아왔다. 서지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내 얼굴을 알아본 순간보다 롤스로이스를 알아본 순간이 먼저인 듯, 시선이 차에서 나에게로, 다시 차로 오가며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보는 순간, 목구멍 안쪽이 뜨거워졌다. 오래전 그녀가 나를 바라볼 때 흔들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흔들림이었다. 그때는 사랑이었고, 지금은 계산이었다. 사람의 눈빛이 이렇게 정직하게 그 속을 드러낸다는 걸, 나는 오늘 다시 배웠다. 윤하나가 조수석에서 내려 내 옆에 섰다. "대표님, 다음 미팅까지 이십 분 남았습니다." 그녀가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말했다. 완벽한 톤이었다. 나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카페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잠깐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그 종소리를 듣는 순간, 예전에 서지아와 이 근처를 지나며 저 카페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커피 한 잔 값이 아까워서 다음에 가자고 미뤘었다. 지금 나는 그 카페 문을 롤스로이스에서 내려 들어서고 있었다. 아이러니라는 말로는 부족한 감정이었다. "오빠?" 서지아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황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김도윤은 처음엔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 "어, 태현 씨." 그가 나를 알아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곧 내 뒤에 서 있는 윤하나와, 창밖에 세워진 롤스로이스로 옮겨갔다. 그 순간 그의 표정에서 작은 균열이 갔다. 균열은 아주 작았지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봤다. 그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짓던 표정,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던 그 눈빛이 지금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잘 나왔다. "저 차..." 서지아가 창밖을 가리켰다. "오빠 거야?" "제가 요즘 좀 바빠서요." 나는 대답을 흐렸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게, 이 각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침묵도 하나의 대사라는 걸, 나는 며칠 동안 각본을 짜면서 배웠다. 말을 아끼면 상대는 그 빈자리를 자기 마음대로 채운다. 그리고 그 채워진 상상은 대부분 진실보다 화려하다. 김도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현 씨,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 그가 물었다. 그 질문에는 우월감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여유로운 척했지만, 손끝이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커피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그 손짓이, 그가 지금 얼마나 균형을 잃고 있는지를 나보다 더 정직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더 큰 무게로 그들에게 내려앉는 걸, 나는 지켜봤다. 윤하나가 다가와 영어로 뭔가를 속삭였다. 실제로는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이었지만, 그 순간 김도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게 보였다. 그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 무지가 그를 더 작아지게 만들었다. 서지아도 그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두 사람 다 눈빛으로 서로에게 뭔가를 묻고 있었는데, 그 물음에 답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어색한 정지 상태를 나는 잠깐 즐겼다. 사람을 이렇게 침묵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짜릿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나는 짧게 말했다. "오늘 미팅이 좀 많아서." 서지아의 눈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후회 같기도 했고, 놀라움 같기도 했다. 나는 그 표정을 분석할 시간을 갖지 않았다. 이 순간 감정을 분석하는 건 사치였다. 분석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각본대로 흔들림 없이 걸어 나가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나는 카페를 나섰다. 등 뒤에서 서지아가 뭔가 말을 걸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박덕수가 미리 문 앞에 서서 뒷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 프로다운 타이밍에, 나는 잠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남자, 사기꾼치고는 지나치게 성실했다. 롤스로이스에 올라타고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겼다는 확신과, 이겨도 아무것도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허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어깨가 무너지듯 시트에 파묻혔고, 그제야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몸이 뒤늦게 알려줬다. 윤하나가 안경을 벗으며 나를 슬쩍 쳐다봤다. "잘하셨어요." 그녀가 처음으로 사투리도 영어도 아닌, 자기 본연의 말투로 말했다. "표정 하나도 안 흔들리시던데요." "연습을 좀 했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사실은 연습한 적 없었다. 그저 무너지면 끝이라는 생각만 붙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몇 분이 지났을 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서지아였다.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벨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카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김도윤이 그녀에게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박덕수가 백미러로 내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안 받으실랍니까?" 나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뒤집어 무릎 위에 내려놨다. 화면이 계속 밝아지고 꺼지는 게 손끝의 감각으로 느껴졌다. 받아야 할 이유와 받지 말아야 할 이유를 동시에 계산했지만, 그 계산은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값을 매기는 일을 오래 했어도, 이런 종류의 셈은 언제나 나를 배신했다. 창밖으로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그 하늘 어딘가에서, 나는 아주 작은 빛 하나가 흐릿하게 움직이는 걸 본 것 같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휴대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림이 멈추기 전에, 이번엔 김도윤의 번호가 화면 위쪽에 새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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