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시한부라서, 일단 최강 찍었습니다

2화

물속에 잠긴 듯했던 감각이 서서히 걷히면서, 나는 대전 천장을 올려다본 채로 눈을 껌뻑였다. 천장에 그려진 용무늬 조각이 흐릿하게 초점을 맞춰가는 동안, 강장로의 얼굴이 시야 위쪽에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걱정과 안도가 뒤섞여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방금까지 내가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확인하고 있었다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정신이 드느냐" 하고 그가 물었고,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등판 아래로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어 있었고,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 완전히 쓰러진 건 아니었던 모양인데, 그 짧은 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마치 정신을 놓았던 그 몇 초가, 통째로 잘려나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느낌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동안 아랫배 쪽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했는데, 굳이 비유하자면 모래주머니를 몸속에 하나 더 매달아놓은 듯한, 그런 무거운 이물감이었다. 근기가 조금씩 갈려나가고 있다는 신호였을 것이다. 그걸 확인하듯, 다시 눈앞에 그 문구가 떠올랐다. [사도위엄 연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사용자: 백운비 / 근기 상태: 손상 진행 중] 그 이유는 아마도, 근기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뭔가가 반응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몸이 무너지는 걸 감지하고 자동으로 튀어나온 안전장치처럼. 실제로 그런 게 있다면, 그것도 참 얄궂은 설계였다. 죽어가는 걸 감지해야만 작동하는 안전장치라니, 이건 안전장치가 아니라 사망 직전 알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는 시야에 떠오른 문구를 하나씩 읽어 내려가며 머릿속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사도위엄이란 무엇인가] [사용자의 근원 경지를 일시적으로 최상위 수준까지 강제 견인하는 능력입니다.] [단, 사용 1회당 근기 손상률이 추가로 누적됩니다.] [현재 최대 견인 가능 경지: 연체9중] 연체9중.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정기종의 무공 체계에서 연체는 총 아홉 단계로 나뉘는데, 9중이라는 건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역사서에조차 이름만 전해질 뿐 실제로 도달한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경지였다. 종문의 서고에서 얼핏 본 기억으로는, 개파조사조차 연체8중 후반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시스템이라는 이 알림창은 그 경지를 마치 창고에서 물건 꺼내듯 빌려 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진짜로 되는 거라고?'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싶어서 곧이어 그 아래 붙어 있는 조건을 눈으로 훑었는데, 예상대로였다. [제약 사항] [1. 발동 지속 시간은 매회 다르며, 사용자가 임의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2. 발동 종료 후, 근기 붕괴 진행률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3. 발동 조건: 생명 또는 존재의 위협 수준이 일정 이상일 때에만 자동 감지됩니다.] 요컨대 이건 공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히 말하면, 목숨값을 조금씩 떼어 쓰는 대출 같은 능력이었다. 이자율도, 상환 기한도 내가 정할 수 없는, 그것도 담보로 잡힌 게 다름아닌 내 남은 목숨인 대출. 100일 시한부인 몸에 이걸 쓴다는 건, 시한부라는 사실을 조금 더 앞당기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지속 시간도 내가 정할 수 없고, 발동 조건도 내가 자의로 못 켠다니. 이건 뭐 목숨 걸고 도박판에 앉았는데 패도 못 고르고 베팅 금액도 내가 못 정하는 꼴 아닌가. "...개사긴데?" 하는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강장로가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했느냐" "아,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입니다" 하고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사도위엄에 대한 이야기를 강장로에게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으니까. 아직 이게 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말을 꺼냈다가, 정기종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게 뻔했다. 시한부인 종주가 정체불명의 힘까지 몸에 지녔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그 뒷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대전 안은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종주 즉위식에서 근기가 붕괴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 되어버린 순간, 대전 뒤편에서 강호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여유로웠는데, 그 여유가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걸음이었으니까. "강장로님, 그리고 원로 여러분" 하고 그가 정중하게 예를 갖췄지만, 그 목소리 아래에는 명백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백운비 소협의 몸이 저러한데, 어찌 그를 종주로 모실 수 있겠습니까. 정기종은 무공을 근간으로 하는 문파입니다. 근기가 무너진 자가 종주 자리에 앉는다면, 이는 문파 전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대전 여기저기서 낮은 동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강호진이 오랫동안 다져온 인망이었을 것이다.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연체8중이라는 경지에 오른 그를, 정기종 제자들 중 누가 감히 얕잡아 볼 수 있었을까. 게다가 그 인망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강호진은 크고 작은 문파 행사마다 앞장서서 실력을 증명해왔고, 그 결과가 지금 이 대전을 채운 낮은 웅성거림이었다. "강 제자, 그 말이 지나치다" 하고 강장로가 무겁게 잘라 말했다. "백운비는 전대 종주 백월의 유일한 혈육이며, 종문의 정통성은 이미 정해져 있다." "혈통이 무공을 대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강호진이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 속에 확신이 배어 있어서 오히려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제가 감히 청하고자 하는 바는, 정당한 비무입니다. 종주 자리에 걸맞은 실력을 증명할 기회를 백 소협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비무. 그 말이 나오자마자 대전 안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원로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갈렸는데, 몇몇은 강호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원로석 왼쪽에 앉은 노인 하나는 손에 든 지팡이를 바닥에 탁 소리 내어 짚으며 눈살을 찌푸렸는데, 아마 강장로와 가까운 파벌인 듯했다. 반대로 오른쪽 몇몇은 이미 강호진 쪽으로 마음이 기운 듯,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조용히 서 있었는데, 머릿속으로는 계속 시스템 문구를 되짚고 있었다. '생명 또는 존재의 위협 수준이 일정 이상일 때'라는 조건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이건 비무 정도의 위협으로는 발동할지 안 할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요컨대 나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몰려야만, 겨우 한 번 연체9중을 빌려 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강호진과의 비무에서 이 힘이 켜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정기종의 비무는 대체로 목숨을 걸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알고 있었으니, 그 확률은 낮을 것이었다. 낮아도 너무 낮았다. 임장로가 내 옆으로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응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네 몸 상태로는 어떤 대결도 무리다" 라고 그가 말했지만, 나는 이미 대전 안의 분위기가 그런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응하지 않는다면, 그건 곧 강호진의 말이 옳다는 걸 자인하는 꼴이 될 것이었다. 대전을 채운 시선들이 하나같이 나를 향해 있었고, 그 시선들 속에는 기대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백월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종주 자리에 앉혀졌지만, 정작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응하겠습니다" 하고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대전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가, 다시 웅성거림으로 채워졌다. 강호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는데, 그 미소가 마치 이미 승부가 정해졌다고 말하는 듯해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근기 붕괴 100일 시한부에, 뜬 정체불명 시스템 하나 믿고 최강 천재랑 맞짱 뜨는 거네.'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발동 조건조차 확신할 수 없는 힘 하나를 믿고 비무를 자청했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건 도박이라기보다는, 판돈을 걸기도 전에 카드를 확인 못 하는 놀음이었다. "사흘 뒤, 정기종 연무장에서 비무를 치르겠습니다" 라고 강호진이 못을 박았고, 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는데, 그 확신이 오히려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대전을 나서는 길, 임장로가 내 옆으로 붙어 걸으며 낮게 말했다. "네 아비도 그랬다. 이길 확률이 낮으면 낮을수록, 더 침착해지는 사람이었지." 그 말에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앞만 보고 걸었는데,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아들놈은 하나도 안 침착한데, 어쩌지.' 복도를 걷는 동안 발밑에서 느껴지는 냉기가 유난히 선명했다. 근기가 손상되고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원래 같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작은 감각들까지도 하나하나 예민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정작 비무 당일에 몸이 못 버텨서 쓰러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치기도 했는데, 그 걱정을 애써 밀어냈다. 지금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사흘. 그 시간 안에 이 정체불명의 사도위엄이라는 것에 대해 뭐라도 더 알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 정기종 역사상 가장 짧게 종주 자리에 앉았다가 쫓겨난 사람으로 기록될 게 뻔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뒤에 이어질 건 근기 붕괴로 인한 죽음일 테니, 짧은 종주 재임 기록 옆에는 사망 기록까지 나란히 붙게 될 것이었다. '...이거 진짜, 웃으면서 넘길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정리하면서도, 입가에는 자꾸 헛웃음이 걸렸다. 사흘 뒤의 나 자신이 그 웃음을 후회하게 될지, 아니면 그 웃음조차 짓지 못하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