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몸, 깨어난 무신

2화

[무신 시스템을 각성합니다.] [각성 대상: 강태현] '미친, 진짜 뜬다.' 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눈앞에 떠 있는 저 파란 창을, 나는 전생에서 수도 없이 봤다. 게임 속에서. 모니터 너머로. 그런데 지금은 내 방 천장 바로 앞에, 마우스 클릭 한 번 없이 떠 있었다. 전생의 나였다면 여기서 방방 뛰었을 거다. 이불을 걷어차고, 소리를 지르고, 아마 부모님이 무슨 일이냐고 뛰어오셨을 거다. 게임 오타쿠 인생 20여 년, 아니 인생 두 번을 통틀어 이런 순간을 얼마나 꿈꿨는지 셀 수도 없다. 밤새 스탯 창 스크린샷을 찍어 커뮤니티에 자랑하는 상상까지 해본 적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좋은 쪽이 아니라, 불안한 쪽으로. 두근두근, 이 아니라 쿵… 쿵… 하는, 뭔가 잘못됐다는 신호에 가까운 박동이었다. [재조정을 시작합니다.] '재조정이라니, 뭘?' 답은 없었다. 시스템은 늘 이런 식이었다. 전생에서 플레이했던 그 어떤 게임보다 불친절했다. 친절한 튜토리얼 따위는 없고, 그냥 통보만 던지고 알아서 하라는 식. 대신 몸 안쪽에서 뭔가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으드득. 관절 마디마디에서 소리가 났다. 무릎, 어깨, 손목 순서로. 마치 오래된 장난감의 나사가 하나씩 풀리는 소리 같았다. 18년간 쌓아온 근육이 실이 풀리듯 흘러내리는 감각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몸속에서 누군가 실뭉치를 잡고 쭈욱 잡아당기는 느낌. "으윽……." 나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한 방울, 두 방울, 이내 등 전체가 젖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뻐근했다. '이거 죽는 거 아니야?' 순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전생에서 죽었을 때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이번 생에서 죽으면 이렇게 아픈 건가 싶었다. 십 분쯤인가, 십오 분쯤인가 지났을까. 시간 감각이 뭉개져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감각이 잦아들었다. [재조정이 완료되었습니다.] [신체능력: 50] '뭐라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167이던 숫자가 50이 되어 있었다. 입시 합격선도 못 미치는, 사실상 훈련 안 한 일반인 수준이었다. 동네 헬스장 다니는 아저씨들도 이 정도는 나올 것 같은데. 18년을 통째로 도둑맞은 거였다. 체육관에서, 새벽 러닝에서, 그 지긋지긋한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흘린 땀이 전부 물거품이 된 셈이었다. "이게 뭔 개소리야."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손이 떨렸다. 주먹을 쥐어보았는데, 어제까지 있던 힘이 없었다. 마치 방금까지 근육이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팔을 들어보니 무겁게 느껴졌다. 내 팔인데 남의 팔 같은, 그 이질감이 소름 끼쳤다. '이럴 거면 왜 각성한 거냐고.' 각성이라는 게 원래 강해지는 거 아니었나? 전생에서 봤던 모든 판타지 웹소설, 게임, 만화에서 각성은 축복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벌칙을 받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상 지급.] [정신력: 400] '정신력……?'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이 세계에는 법사라는 직업이 없다. 무자만이 존재하는 세계. 체력, 근력, 반응속도, 회복력 — 이런 숫자들이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계. 정신력이라는 스탯은 존재조차 알려진 게 없었다. 학교에서도, TV에서도, 심지어 협회 공식 자료에서도 이런 스탯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롤플레잉 게임 세계관에 갑자기 방치된 카드게임 스탯이 낀 것 같은, 그런 이질감이었다. RPG 하다가 갑자기 트레이딩 카드게임 창이 뜨는 느낌. '400이라는 숫자가 크긴 한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 이 세계 사람들한테 "저 정신력 400이에요"라고 말하면 다들 무슨 표정을 지을지 상상이 갔다. '그게 뭔데?' 라는 표정. 나는 침대에 다시 누워 천장을 노려봤다. 천장 벽지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이 방에서 18년, 아니 정확히는 새로 태어난 이번 생 18년을 보냈다. 그 시간이 통째로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대학 입학 자격은 신체능력 최소 기준이 있었다. 전국 대학이 다 그런 식이었다. 이 세계에서 대학은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무자 양성소에 가까웠으니까. 입시 때 167을 찍었으니 통과했지만, 지금 50이라면 재검사에서 바로 탈락이다. 탈락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됐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집에는 이미 대학 합격했다고 말했다. 동네방네 자랑까지 했다. 옆집 아주머니한테도, 친척들한테도. 부모님이 그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은행을 세 군데나 돌아다녔단 것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은행 창구 앞에서 굽신거리던 뒷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강호랑 소영 누나, 오늘 파티에서 웃던 얼굴들. 케이크에 촛불 꽂고, 다들 축하한다고 소리치던 그 장면이 눈앞에 스쳤다. 다 무너질 판이었다. '정신력 400이 대체 뭐에 쓸모가 있는데.' 나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전생의 습관이었다. 무너진 상황일수록, 감정보다 계산이 먼저였다. 레이드 실패했을 때도 그랬다. 파티가 전멸해도 일단 로그부터 뜯어보고, 뭐가 잘못됐는지 분석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입학 전 재검사는 보통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첫날. 그러니까 정확히 나흘 남았다. 머릿속으로 달력을 그렸다. 오늘, 그리고 사흘 더. 나흘 안에 무언가를 해야 했다. 숨기든, 버티든, 아니면 진짜로 몸을 되돌리든. 셋 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신체능력을 나흘 안에 117이나 끌어올리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숨기는 것도 불가능했다. 재검사는 실측이니까. '정신력이라는 게 진짜 아무 쓸모가 없을까.' 의심이 들었다. 이 세계에 없던 스탯이 갑자기 400이나 붙었는데, 그게 순수하게 장식용일 리는 없었다. 적어도 게임을 좀 해본 놈으로서, 그런 밸런스는 절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밸런스 패치도 없이 장식용 스탯을 400이나 박아 넣는 게임은 없다. 그런 건 개발자가 미친 게 아니면 반드시 뭔가 숨겨진 메커니즘이 있는 거다. '뭐가 됐든, 나흘 안에 실전에서 증명해야 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동이 트고 있었다. 주황빛이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이미 러닝을 나갔을 거다. 신체능력 50짜리 몸으로 러닝을 나갔다간 첫 백 미터에서 헐떡거릴 게 뻔했다. 새삼 그게 서글펐다. 그 순간, 휴대폰이 진동했다. 강호였다. [내일 오전에 학교에서 신체능력 사전 재확인 있대. 입학처에서 갑자기 공지 떴어.] 메시지 밑에는 강호가 늘 붙이는 이상한 이모티콘까지 붙어 있었다. 평소라면 웃겼을 텐데, 지금은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내일이라고?' 나흘이 아니라 하루도 안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자가 바뀌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시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내일 오전, 학교, 재확인.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이렌처럼 울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떨리는 손으로 다시 상태창을 열었다. [신체능력: 50] [정신력: 400] 숫자는 그대로였다. 바뀌길 바랐지만, 시스템은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래, 뭐라도 해봐야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막힌 스테이지를 앞두고, 밤새 공략을 뜯어보고, 실패하고, 또 뜯어보고. 그렇게 버텨서 여기까지 온 인생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불안한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력 400짜리로 신체능력 검사를 어떻게 통과해.' 답은 없었다. 밤은 이미 지나가고 있었고, 내일은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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