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몸, 깨어난 무신

3화

입학처 공지는 진짜였다. [신입생 전원, 입학 전 신체능력 재확인 필수. 미이수 시 합격 취소.] '아니 이게 무슨 뒤통수야.' 입시 합격하고 겨우 이틀. 축하한다는 문자 받고 부모님이랑 치킨 뜯은 게 어제 저녁인데. 그런데 재검사가 바로 다음 날이라니. 전생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급박한 시험은 없었다. 수능 성적표 나오고 바로 다음 날 체력장 보라는 소리 들으면 다들 뒤집어졌을 거다. '여기는 그런 상식이 없나 보네.' 무술계 대학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나만 유독 재수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대학 부속 체육관 앞에 줄이 늘어섰다. 줄 길이만 봐도 신입생이 몇 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다들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나만큼 긴장한 사람은 없을 거였다. 옆줄에 선 애는 팔굽혀펴기를 서서 흉내 내고 있었고, 뒷줄 애는 계속 손목을 꺾어대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그래도 뭔가 자신이 있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나는 그냥 가만히 서서 숨만 골랐다. "태현아, 왜 그렇게 죽상이야?" 강호가 옆에서 물었다. "어제 못 자서." 나는 대충 둘러댔다. '못 자긴 했지, 진짜로.' 밤새 이불 속에서 별의별 시나리오를 다 그려봤으니까. 숫자가 낮게 나와서 쫓겨나는 장면, 정미주라는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비는 장면, 심지어는 학교 정문에서 부모님이 우는 장면까지. '상상력만 늘었네, 이 와중에.' 줄이 줄어들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체육관 문이 열리고 한 명씩 들어갈 때마다, 나는 저 사람이 몇 번째로 들어가는지 세고 있었다. '나는 몇 번째지... 아직 서른 명이나 남았나.' 시간이 그렇게 안 갈 수가 없었다. 측정 장비는 단순했다. 악력계, 반응속도 측정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신 스캐너. 스캐너에 서면 숫자가 그대로 화면에 뜬다고 들었다. 옆에서 누가 그러는데, 저 스캐너는 근력, 반응속도, 심지어 뼈 밀도까지 다 합쳐서 하나의 숫자로 뽑아낸다고 했다. '그러니까 도망칠 구멍이 없다는 소리네.' 50이라는 숫자가 뜨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끝이었다. '도망칠까.' 생각은 했지만, 도망치면 그날로 인생이 끝이었다. 등록금, 부모님, 강호, 소영 누나. 다 무너지는 그림이 눈앞에 그려졌다. 부모님이 대출까지 받아서 마련한 등록금인데, 그걸 하루 만에 날려먹으면 얼굴을 어떻게 보나. '강호 저 녀석은 또 얼마나 놀리려고.' 그런 잡생각들이 줄 서 있는 내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강태현 씨, 다음이요." 담당자가 불렀다. 드디어 내 차례였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애써 침착한 척 걸었다.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자, 팔뚝이 내 넓적다리보다 두꺼운 여자가 서 있었다. 정미주. 청림무술대학 모집 담당 선배로, 신입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설처럼 불리는 사람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입학 시험 당시 스캐너 최고 기록을 아직도 갈아치우지 못했다고 했다. '저 팔뚝으로 사람도 던진다던데.' 가까이서 보니 소문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강태현 학생, 입시 성적 167이었네요?" 그녀가 서류를 보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답했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167이라는 숫자가 오늘도 유효할지가 문제지.' 입시 성적이랑 지금 이 순간의 신체능력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그럼 골강단부터 받고, 스캐너 앞에 서요." 그녀가 작은 병을 건넸다. 1급 골강단(骨強丹). 뼈와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신입생 지급용 영약이었다. 병뚜껑을 열자 한약 비슷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걸 먹으면 뭔가 달라지려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그것을 삼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식도를 지나 위장까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오, 이거 좀 그럴싸한데.' 기대감이 살짝 부풀었다. 하지만 숫자가 갑자기 3배로 뛸 리는 없었다. 이런 영약이 정말 그렇게 만능이었다면, 애초에 입학시험이라는 게 존재할 이유가 없었을 거다. '세상에 공짜는 없지, 역시.' 스캐너 앞에 섰다. 발판에 발을 올리자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화면이 깜빡이며 숫자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숫자가 뜨기 전까지 그 몇 초가 마치 몇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제 죽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낯익은 이명이 울렸다. [정신력을 활용해 신체능력 측정치 왜곡 가능.] '뭐? 이런 것도 되냐?' 놀랄 틈도 없었다. 나는 이 순간이 나흘 동안 고민한 답이라는 걸 직감했다. 정신력 400이 그저 장식이 아니라는 확신. '그럼 이걸 어떻게 쓰는 거지?' 전생에 읽었던 무슨 명상 서적 구절이 떠올랐다. 근육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는, 그때는 그냥 헛소리라고 넘겼던 문구였다. '지금은 그 헛소리에 목숨을 걸어야겠네.' 나는 눈을 감고, 전생부터 해온 명상 흉내를 냈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근육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했다. 허벅지부터 시작해서 등, 어깨, 팔뚝까지 순서대로 이미지를 그려나갔다. 정신력으로 근섬유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통제한다는 이미지를 그렸다. '되든 안 되든, 지금은 이거밖에 없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주변 소음이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삐빅-! [측정 완료. 신체능력: 89] '89? 겨우 89?' 솔직히 기대는 더 컸다. 정신력으로 밀어붙였는데 세 자릿수는 찍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역시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지.'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커트라인은 넘겼다. 청림무술대학 최소 기준은 60이었으니까. 29점이나 여유롭게 넘겼다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통과입니다." 정미주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서류와 화면을 한 번 더 오갔다. '뭐야, 뭐 이상한 거 발견했나.' 순간 심장이 덜컥했지만,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다음 사람을 불렀다. '다행이다, 살았다.' 나는 체육관을 나오며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참았다. 아까부터 참았던 숨을 그제야 길게 내뱉었다. 89라는 숫자는 위험했다. 간당간당한 통과, 딱 그 정도였다. 다음 실전 상황에서 또 이렇게 왜곡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매번 이렇게 목숨 걸고 명상할 순 없잖아.' 정신력을 얼마나 소모했는지도 감이 안 왔고, 이게 계속 통할 재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정신력은 진짜 히든카드였다. '4년. 이 안에 진짜 몸을 되돌려야 한다.'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정신력으로 신체능력을 임시로 끌어올리는 것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시 근육을 만드는 훈련까지.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스케줄을 그려봤다. 아침엔 기초 체력, 오후엔 정신력 운용 연습, 밤엔 무술 이론. 남들이 보기엔 낙오자처럼 보이겠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89로 시작해서 얼마까지 올릴 수 있을지 한번 보자고.' 체육관 밖으로 나오자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났다. '일단 오늘은 통과했다.' 작은 성취감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다음 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체육관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현아, 오늘 저녁에 강호가 재밌는 데 가자는데." 한소영 선배였다. 한소영 선배는 늘 저렇게 불쑥 나타나는 재주가 있었다. 방금 죽다 살아난 사람 붙잡고 저녁 약속을 잡는 그 여유가 신기할 정도였다. "재밌는 데요?" 나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지하 격투장." 그녀가 씩 웃었다. '하필 오늘.' 방금 스캐너 숫자 89 찍고 나온 놈한테 격투장이라니.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리는 것 같았지만, 이미 그녀의 눈빛은 대답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통보를 하는 쪽이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